문학평론가

영화 <곡성>을 필두로 국내에서도 오컬트(occult)물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곡성> 식의 정통(?) 오컬트물의 핵심은 '비확정성'에 있다. 어떤 일이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컬트물에 등장하는 존재 자체는 납득되기도, 설명되기도 어렵거니와 그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데에도 대단히 논리적인 이유가 있지 않기에 '오컬트물'로 불린다.

한편 <곡성>을 뒤이은 <부산행>은 오컬트를 결합한 재난영화에 가깝다. <부산행>은 오컬트물의 암묵적인 룰이었던 '비논리성'을 깨뜨린다. 이 영화의 좀비는 불가해한 존재가 아니다. 영화는 그들이 '특정한 원인'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좀비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인간군집의 모습은 흡사 아비규환이다. 논리적 인과성이 명백한 일과 오컬트의 결합은 단지 허구에서 끝나지 않고 흡사 '재난' 형태인 우리 사회를 재고하게 한다.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부여함으로써 절망적 세계와 인간존재를 드러낸 영화는 물론 이전에도 있었다. <캐빈 인 더 우즈(the cabin in the woods)>(2012)에는 인간을 대상으로 '오컬트 문법'을 조작하는 국가단체가 나온다. 영화에서 발현되는 모든 오컬트적인 것들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 조작되며 인물들은 그들의 대의에 의해 살해될 뿐이다. 오컬트물의 기본 공식인 '비과학/비논리성'이 지극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계산에 따라 산출된 것이라는 설정은 가히 충격적이다.

'만들어진' 오컬트 세계에 등장하는 괴물 및 죽어가는 인간들이 담긴 영화에 관객이 열광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저 '재미' 지평의 확대일 수도 있겠지만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논리가 잘 대입된 오컬트물은 지금 이 세계의 폭력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우리는 권력에 의해 호출되는 각종 괴물의 처지와 그런 괴물들 앞에 속수무책 죽어가는 인간의 비참함을 목격한다. 그럼에도 죽지 않으려는 저 세계의 인간을 보며 '이 세계'의 불편함을 감각한다. 그 불편함을 생산하는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이러한 의문을 품게 하는 한 장르로서 오컬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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