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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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산과 강물을 찍은 풍경이 아닙니다. 화가가 해석해서 가필하고 덧바른 유화와 같죠. 초등학교 동창생 몇이 모여서 학교 운동회를 회상하면 세부적인 내용은 모두 다를 겁니다. 하지만 운동회에서 발을 묶고 달리거나 기마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는 뼈대는 같습니다. 기억은 그런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적당하게 색칠도 하고 구멍 난 부분은 메워주며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합니다. - 정광모 소설가의 소설 <존슨기억판매회사> 중에서

소설 <존슨기억판매회사>는 제목에서 짐작되듯 기억을 판매하는 회사에 관한 얘기다. 일반적인 기억이 아니라 톱스타의 은밀한 사생활과 같은 기억들을 판매한다. 기억은 의도적으로 조정된다. 구매자의 입맛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기억은 기억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재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구매자의 입맛에 의해 기억을 판매하는 회사가 조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니 엘리 프레이저의 <생각 조정자들>이 떠오른다. 책에서는 이미 우리의 생각이 편리함을 명분으로 조정당하고 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검색결과를 보여주는 구글, 내 구매행동을 분석하여 물건을 살 시점에 친절하게도 할인쿠폰을 보내는 쇼핑몰. 신용카드와 대형 유통사들의 할인카드, 멤버십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제공하고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검색결과 역시 나의 그동안의 검색과 탐색의 결과치를 종합하여 필터링 된 정보를 보여준다. 그런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내 생각은 점점 더 보고 싶은 것, 익숙한 것, 나와 생각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의 블로그나, SNS를 더 자주 접하게 된다. 어느새 정보통신 기기의 발달로 점점 더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이젠 나의 생각을 기기의 통계치가 조종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이 세계 전체가 어떤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개인 역시 조정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주체적 인간'이란 이젠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절망스러워지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마냥 부정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보니 소설 속 기억을 판매하는 회사가 허구가 아니라 실재할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소설 속의 내용이 리얼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