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최근에 다녀온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는 꽤나 사람들로 붐볐다. 워낙 대중에게 친근한 화가라 전시가 성황리를 이루었겠지만 한편 그 친숙함 뒤에 '예술가의 비극'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백년의 신화'는 이중섭의 작품은 물론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작품과 편지에는 그가 살아 이루고 싶었던 것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특히 자전거가 있는 마당에 가족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인상적인데 이는 이중섭의 지인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이중섭은 꼭 자전거를 사서 돌아가겠다고 편지에 수십 번 적었으면서 끝내 자전거를 사지도,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게다가 40세의 결코 많지 않은 나이에 무연고자로 사망하였으니 '예술가의 비극적 삶'이라 할 만하다. 이런 비극적인 예술가의 삶은 어째서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그들의 생애 동안 하고 싶었던 것이 '단 하나뿐'으로 명확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평균 70년의 생을 산다고 하자. 거진 20년을 누군가의 보호 속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50년은 오롯이 개인이 살아내야 할 몫이다. 그 시간동안 자신의 고집대로 살 수도 적당한 타협 속에서 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결국 개인은 자신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놓여서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산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는 일이며, 삶에서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그 시간을 '쓰는 일' 뿐이다. 어차피 차선을 선택하며 보낼 시간이라면 최선의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지만 누구도 후자를 쉽사리 선택하지 못한다.

'단 하나'의 최선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그 외의 것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생에서 하고 싶은 '단 하나'만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사는 일은 참 쉽지가 않다.

자주 포기하고 싶어지는 시간들을 견디는 일임에도 '단 하나'를 발견하고 살아내는 데서 훌륭한 예술가의 비극은 온다. 그리고 후대의 전시회는 그 비극에 대한 경의(敬意)의 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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