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인천예총 사무처장


작가란 사람인(人)과 작(作)을 합쳐
사람이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작(作)가 앞에 대(代)라는
접두어를 쓰면
'대신한 사람'의 뜻으로
바꿔치기를 함이 된다 하니
작(화)가는 아닌듯 싶다


가수 조영남의 그림 대작 사건이 연일 매스컴을 달구고 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로 본인은 덧칠인지 약간의 수정을 하고 싸인을 해 전시, 다 자기가 그린 것처럼 팔았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더욱더 황당한 일은 아이디어만 내면 대작가가 그리는 것이 관행이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막장'이다. '갈 데까지 다 간'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 같다.

황당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설치미술이나 건축, 조각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조영남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 아닌가 한다. 모름지기 회화에서는 실제로 그린 사람이 그 그림의 작가다. 그렇다면 그의 경우는 공동제작이라고 해야 옳은 것 아닐까. 물론 홋수로 표현 못할 대작과 벽화 또는 기록화라 해 누가 보아도 혼자 할 수 없는 불가사의 한 크기의 작품이면 몰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괴변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옛말을 잘 이행하고 있다.

앤디 워홀은 팝 아트의 대가다. 그의 작품은 대량생산으로 찍어낸 상업미술이었고 공공연히 밝히며 당당했고 루벤스도 예술가이자, 사업가로 미술작품 방문판매의 원조라고 할까. 다 세상에 드러내 놓고 대작을 했던 것이다. 어떤 미술평론가와 문화운동가가 이 대작사건은 문제삼을 것이 없다면서 항변을 하니 빗나간 비유에다 '기침소리로 방귀를 가리는 짓'을 하며 두둔하고 있으니 '막장'이 아닐 수 없다.

그림이라는 것이 본시 심화(心畵)라고 마음속에서 문과 질이 조화를 이뤄 빛나는 문질빈빈(文質彬彬)에 이르고 진선진미(盡善盡美)에 닿아야 하는 것인데도 문제 삼을 것이 없다니 무식이 영그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각종 미술대전은 화가의 등용문이다. 동, 서양화를 막론하고 심사를 하고 특선이상의 출품자에게는 별도의 시간과 장소를 마련 '현장휘호'를 거쳐 최종심을 발표한다. 이 휘호를 하는 이유가 바로 대작이나 대필을 한 것을 골라내기 위한 또 하나의 절차다.

휘호에 불참하면 낙선 처리되는 이 제도는 대상이나 그에 버금가는 상에는 그림과 명제를 다른 것으로 그리고 써보게 하는 옛 과거시험과 맥락을 함께하는 사례다. 대전마다 좀 다르긴 해도 점수제에 의해 추천, 초대작가가 되는, 진정한 의미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작가란 사람 인(人)과 음을 가리키는 작(乍)을 합쳐 사람이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작(作)가 앞에 대(代)라는 접두어를 쓰면 '대신한 사람'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바꿔치기를 함'이 된다 하니 조영남은 작(화)가는 아닌 듯싶다.

작품을 완성하는 기교에는 형태, 비례, 색감 등 여러 요소가 존재하며 켄버스나 화선지 위에서 표현되는데 기획, 구도의도를 말로 듣고 구상도 아닌 추상화가 가능한 일이며 품(品)으로서의 완벽을 기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넘친다. 그가 화가로서의 자기를 원한다면 윤리의식부터 가슴에 심었어야 할 일이다. 예술에 있어 그림을 배우는 과정은 상리(常理), 즉 법축을 배우는 것인데 사의(寫意)에 이르기를 먼저 하니 무늬만 화가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동안 세상을 놀라게 한 소설가의 표절사건의 교훈이 가시지 않았고 제자의 대필로 완성한 논문을 교수의 이름으로 발표하며 교직에서 매장되는 일들을 우리는 많이 봐 왔다. 글에 있어서 인용사실을 밝히고 도움이나 조언까지를 명기하고 있는 반면 그림의 경우에는 남에게 시켜 얻은 것을 자기 것이라 하고 관행이라 항변하는 모습들, 윤리의식이 없다 할 수 밖에 무엇이 더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 보이고 만사에 초연한 예술가 그러나 불쌍하리만큼 찬란한 빈곤 속에서 창조의 근성을 가지고 상식과 윤리의 길을 가고 있다.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 없어야겠고 덩달아 욕 먹이는 사람 없었으면 좋겠다. 작가는 영혼까지 쏟아 붓고 작품으로 말하며 웃고, 울고 있다. /시인·인천예총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