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연 수필가·전 인천시약사회장
▲ 김사연 수필가·전 인천시약사회장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0일 제19회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파괴적인 혁신 수준의 규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특히 경쟁국인 일본이나 중국은 원격진료나 사물 위치 정보 서비스, 드론 택배 등 규제를 과감하게 정비해 허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한약사회는 규제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원격진료, 의약품 화상 자판기(화상 투약기)와 조제약 택배가 실현될 경우 재벌과 대기업이 보건의료시장을 장악해 경제 활성화가 아닌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부채질 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정부는 약사법 개정안을 오는 10월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지만 이런 편의성만을 앞세운 규제개혁 안건들은 대통령의 시행령 개정만으로도 처리될 수 있어 한 순간 설 자리를 잃게 될 소규모 동네 의원과 약국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원격진료, 인터넷 의약품 판매와 택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012년 5월, 국민 편의성을 앞세운 정책으로 가정상비약 20여종이 24시간 편의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외국에 가보니 슈퍼마켓에서도 간편히 감기약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대통령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토 면적은 한국보다 몇 십 배나 넓은 데 비해 인구는 훨씬 적은 국가의 특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발상이다.

20여종의 가정상비약은 부작용을 무시할 수 없는 일반의약품이라지만 그 동안 약국에서 약사가 아닌 종업원이 판매하면 약사법 위반으로 강력한 처벌을 당한 품목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약품을 '서당개 3년 풍월'도 모르는 편의점 종업원이 과자처럼 판매하는 모습에 약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또 60여개 의약품을 화상 투약기를 통해 판매하겠단다. 보다 전문적인 복약지도가 필요해 편의점 종업원에게 넘기지 못했는지 약사의 생존권을 위한 정부의 눈물겨운 배려였는지 모르겠다.

가격이 1500만원 정도인 화상 투약기는 2012년 모 약사가 개발해 인천 부평지역 약국에 설치됐다가 전국 약사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된 선례가 있다. 투약기의 전면이 약국 유리창 밖에 걸치고 있어 약국이 문을 닫은 후라도 화면에 비친 약사의 얼굴을 보며 환자가 의약품을 상담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가 설치된 단골 약국의 약사가 24시간 화상 투약기 카메라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면엔 여러 약국에 설치된 화상 투약기를 찾은 환자들과 순번대로 상담 판매를 맡고 있는 관리업체 소속 낯선 약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약국 개설자가 아니면 의약품을 판매할 수 없다'는 약사법 제44조 제1항을 개정해야 한다. 이로 인해 약사들은 자칫 '1약사 다수 약국 개설 가능'으로 소규모 약국이 대자본에 흡수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심야 근무 약사의 고비용 때문에 화상 투약기 관리회사가 충분한 인력을 확보하지 않을 경우 응급환자는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 복약지도까지 철저히 하면 대기 시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화상 투약기 약들은 약국 외부의 창을 통해 진열되므로 기계 내부에는 열과 빛을 차단하는 장치가 미흡하고 햇빛에 장시간 노출 시 약이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도난·약화사고가 발생했을 때 설치 약국과 관리회사간의 책임 소재도 명확치 않다. 약사법 제21조 제3항 제1호에서는 약국개설 약사가 약국 시설 뿐 아니라 의약품을 위생상 위해가 없고 효능이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도록 명시하고 있는데 설치된 화상 투약기는 약국개설 약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약기에는 해열소염진통제, 종합감기약, 수면유도제, 피임약, 연고, 멀미약, 파스, 근육이완제를 비롯한 60여종의 일반약이 내장돼 있어 오·남용 위험에 노출되고 부작용이 발생했을 때 환자는 누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아야 할지도 명확치 않다.

정부는 국민 편의를 위해 구정이나 추석 연휴 때 당번 약국과 의원을 운영하지만 연휴 기간 중에 은행이 당번제로 문을 연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시장 경제가 더 활발하게 돌아가는 것은 국민들이 명절과 설빔 자금을 미리 찾아 준비하고 당번 약국은 며칠 간 사용할 잔돈과 동전을 사전에 준비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약국을 하던 시절, 남들은 연휴를 이용해 해외여행을 떠난다지만 약사회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조상님들께 차례만 지내고 별로 바쁘지도 않은 당번 약국을 지켰다. 그 때마다 약사는 전쟁이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당번 약국을 지켜야만 하는지 회의감을 품곤 했다. 편의성만 내세운 화상 의약품 판매기보다 평소 상비약을 준비하는 생활 습관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미래를 대비한 현명한 정책이 아닐까. /김사연 수필가·전 인천시약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