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나는 볼펜을 쥐는 즉시 머릿속에서 줄줄 흘러나온 검은색 문장들이 아니라 쓰지 못하고 있는 빨간색 문장들을 써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온몸에 남은 오감의 경험을 문장으로 표현해야 할 텐데, 그건 쉽게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아무리 잘 쓴 문장도 실제의 경험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작가의 고통이란 이 양자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됐다.' - 김연수 소설가의 소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한강 소설가가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로 권위 있는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조심스럽게 수상을 점쳐보기도 했다. 이 소설이 갖는 세계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언어의 의미를 완벽하게 번역해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 대목에서는 고개가 저어졌다. 다행히 문학에 대한 놀라운 안목과 번역 능력을 가진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있었다.

한강 작가가 말했듯이 이 수상은 번역가의 힘이 컸다. 우리의 언어가 번역을 필요로 하는 한글이고, 다 알다시피 한글의 미묘한 뜻을 영어나 다른 나라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번역 문제는 앞으로도 거시적 차원에서 논의되고 진행되리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이 번역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나는 오로지 한글로만 작품을 말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한 원로작가를 만났다. 어떤 경우도 번역이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가 어느 나라 언어로 작품을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언어로든 최선을 다해 작품을 쓰면 된다는 말씀이기도 했다.

소설에 나오는 '검은 문장'은 머릿속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문장들을 검은 볼펜으로 쓴 초고의 글이다. '빨간색 문장'들은 그 검은색 볼펜으로 쓴 문장들을 최선의 문장이 될 때까지 빨간색 볼펜으로 퇴고한 문장이다. '정말 여기까지가 다 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고개가 끄덕여질 때까지 작가는 빨간색 볼펜으로 쓰고 또 고치며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과 세계를 담아내면 되는 것이다. 언어든, 출판이든, 상이든 그 이후의 문제는 작가의 손을 떠난 것이다. 다만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으면 된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