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학 박사

필자는 지난 3월9일부터 15일까지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의 바둑 대결을 지켜보면서 많은 감정들의 교차를 느꼈다. 특히 이 9단이 처음 세 판을 졌을 때 필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무기력함과 좌절감을 느꼈다. 이는 단순히 어떤 게임에서 한 쪽 편의 응원자로서 느끼는 승패에 대한 감정이 아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불확실성이었다.

필자는 "이제 앞으로 내가 따라가기 벅찬 시대가 도래할 수 있겠구나"라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어 며칠 동안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었다. 인공지능에 관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컴퓨터와 결합한 인간이 감정까지 갖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현재까지는 치료목적으로 환자에게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인간의 감정영역을 컴퓨터와 연결해 조정하고 있다. 나는 이번 인간과 인공지능 컴퓨터와의 대결을 보면서 많은 감독들이 이와 비슷한 주제로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디스토피아(dystopia) 영화들을 떠올렸다.

디스토피아는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국가인 유토피아의 반대로 감시와 통제로 억압받는 가상의 사회를 그려낸 문학작품이나 사상을 의미한다. 디스토피아 영화들 중에는 많은 통제의 기제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만들어 낸 기계와 인간복제에 의해 우리 자신이 통제되기도 하고 질병, 환경, 식량, 인구문제들도 우리를 파괴하고 통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디스토피아는 가상세계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로는 독자들도 많이 알고 있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있다. 디스토피아의 관점에서 그려진 영화들은 다수 있다.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1965), 프랑수아 트뤼포의 '화씨 451'(1967)을 비롯해 '가타카'(1998), '아일랜드'(2005), 'A.I.'(2001), '매드맥스2'(1981), '설국열차'(2013) 등 많은 영화들이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암울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 중 오늘 필자는 2017년에 후속 작 개봉이 예정 된 '블레이드 러너'(1982)를 소개한다.

1982년 미국에서 개봉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이 영화는 당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으며 대중들에게까지 외면을 당했지만 10년 뒤 감독 판이 재개봉되면서 재평가를 받게 됐고 우리나라에서도 감독 판으로 1993년에 개봉됐다. 이어 감독은 2007년 몇몇 샷들을 추가해 최종판을 만들었다. 스콧 감독의 집요함과 완벽주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는 2019년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시대적, 지리적 배경과는 거리가 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모든 문화가 융합된 듯한 배경은 스콧 감독이 40년 전 제작 당시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감독은 낮과 밤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침울하고 우울한 어두운 톤을 영화 내내 유지하면서 더 이상 지구가 살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대기업 타렐사는 이런 지구를 대신해 인간들이 거주할 행성들을 개척하기 위해 감정을 제외하면 인간하고 똑같은 리플리컨트(복제인간)를 만들게 된다. 인간들은 이 복제인간들을 이용해 식민행성을 개척하게 하고 그 곳으로 이주한다. 이 복제인간들은 감정을 가질 수 없게 만들어졌지만 이들 중 몇 명의 복제인간들이 감정을 갖게 된다.

이들은 4년 밖에 살수 없는 자신들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행성을 탈출해 지구로 찾아온다. 영화의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블레이드 러너로써 행성에서 탈출한 복제인간들을 잡아서 폐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요원이다.

데커드는 지구로 탈출한 복제인간들을 하나씩 처리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레이첼(숀영)과 함께 도망을 가면서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영화를 보고 난 많은 관객들은 주인공 데커드 또한 복제인간이라고 주장했고 감독은 후에 그 주장을 뒷받침했다.

영화 내 많은 장면들에서 이를 뒷받침 해주는 단서들이 발견된다. 이 영화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면서 '진짜' 와 '가짜', 원본과 복제, 이성과 감정, 그리고 선과 악 등 많은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만드는 영화다.

기술발전이 현대인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할수록 그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발전에 대한 경계를 명확히 그어야 할 필요가 있다. 디스토피아 영화들은 우리가 규정지어야 할 경계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