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평 고잔고 교사 
이우평.jpg
▲ 이우평 고잔고 교사

세계 모든 종교가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목적으로 하지만 각 종교는 교리, 사상 또는 교도들간 이권 등의 문제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기도 한다. 그 대립의 정도가 지나쳐 서로 피를 흘리고 종교의 본질에서 동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종교들도 있는데,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가 바로 그렇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과 서로간의 증오는 무려 1000년 넘게 계속돼왔다.

이슬람교가 교세를 확장하던 중, 632년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숨을 거둔다. 이후 후계자 칼리프(이슬람교에서 제정통치자를 말함) 계승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됐고, 우마이야 왕조가 건국될 때까지 모두 4명의 칼리프가 있었다. 이슬람교에서 칼리프는 신자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됐다.

3대(아부 바르크, 우마루, 오스만)까지는 무함마드와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칼리프였으나 제4대 칼리프 알리는 무함마드의 조카이자 또 사위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이제부터 무함마드의 자손이 칼리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나타났다.

661년 알리가 암살된 직후 무아위야는 그의 장남 하산을 물리치고 칼리프를 자청하며 우마이야왕조를 열었다. 그 후 알리의 장남은 전사하고 차남 후세인 또한 죽고 말았다. 우아미야왕조 이후 칼리프의 지위는 세습됐는데, 이러한 우마이야왕조가 이슬람의 정통파임을 주장하는 파가 수니(sunni)파다.

반면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핏줄을 이어받은 알리 가문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파가 시아(shiah)파다. 따라서 이들은 알리 이전의 세 명의 칼리프는 찬탈자라고 말한다. 이후 750년 알리의 후계자임을 자청하는 시아파의 압둘 압바스가 우마이야왕조를 무너뜨리고 압바스왕조를 열었다.

압바스왕조는 다마스쿠스였던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으며 이 왕조 아래서 이슬람교가 크게 번성했다. 그 후 알리의 장남 하산의 자손들은 계속해서 같은 시아파인 압바스왕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저항했다.

한편 차남 후세인의 자손들은 정치적 활동을 금한 채 종교적 활동에 매진해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들아 됐다.

756년 압바스왕조에 의해 쫓겨난 수니파의 알 라흐란 1세는 압바스왕조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빼앗아 후(後)우마이야왕조를 세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확대되는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됐다. 이후 수니파와 시아파는 자신들의 왕조가 무함마드를 이은 정통 칼리프라고 주장하면서 서로 맞서고 있다.

수니파는 전체 이슬람교도의 약 90%를 차지한다. '수니'란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따르는 자들'이란 뜻으로 이집트, 터키, 이라크 등 아랍 대부분의 나라가 수니파에 속한다. 반면 시아파의 '시아'는 '도당, 파벌'이란 뜻으로 '알리의 추종자'란 뜻의 '시아트 알리'에서 유래됐다.

시아파는 전체 이슬람교도의 약 10%를 차지하는데 이란을 중심으로 아프가니스탄, 키르키즈스탄에 퍼져 있다. 이란이 시아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사산왕조 최후의 왕 아즈데게르드의 딸이 제4대 칼리프인 알리를 낳았다는 구전(口傳)이 유포돼 많은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시아파 이슬람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알라를 숭배하지만 별개의 모스크와 서로 다른 종교의식, 서로 다른 역할의 지도자를 추종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공동체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수니파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원래 무지한 인물로 신의 계시만을 전달한 보통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는 완전무결한 신적 속성을 소유한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80년 발발해 약 10년간 펼쳐진 이란-이라크 전쟁은 국경지대의 영토점유를 둘러싼 정치적 전쟁을 뛰어넘은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전쟁이기도 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수니파와 시아파는 알라를 믿는 이슬람교도라는 형제애로 똘똘 뭉쳐져 있기도 하다. /이우평 고잔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