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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구는 사료(史料)로써 수행된다. 제 아무리 탁월한 식견을 지닌 학자라 해도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이는 연구를 더 진척시킬 수 없다. 몇몇 국산 영화들처럼 어설픈 상상력을 발휘했다가는 역사를 날조·왜곡하기가 십상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어디서 체결되었는가에 대한 천착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향토사 저서 '개항과 양관 역정'을 남긴 최성연 선생이 '화도진(花島鎭) 체결설'을 주장한 이래 그에 대한 사료의 발굴 여부가 연구사(硏究史)의 핵심이 되어 왔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까지 동조했던 '화도진' 설(說)에 대해 문제 제기를 처음 한 이는 '내리교회100년사'를 집필한 박철호 목사였다. 그는 과거에 논의되지 않았던 영문(英文) 사료들을 발굴해 본보에 게재하면서 '화도진' 설의 오류를 과감히 지적했었다.

▶다만, 구체적인 거리와 주택 위치 등을 나타낸 지도가 발견되지 않아 지금의 파라다이스 호텔 부지로 체결지를 추정할 수밖에 없던 아쉬움은 있었지만, 여러 정황과 증언, 기술로 보아 '화도진' 설이 '오역(誤譯)'과 '천막 체결설'을 부정한 데 따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차에 연전에 세관사(稅關史) 연구가인 김성수 국세청 서울본부세관 감사담당관이 개항 당시의 '해관(海關·현 세관)' 자료와 구체적 지형도를 제공해 본보가 특종 보도하였고,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시 역사자료관과 시사편찬위원회가 최근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관계자가 대거 참석한 이날 대회는 긴 여정을 거쳐 온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에 대한 연구를 확증적으로 종결지음과 동시에 논란이 있던 조약 체결지를 비로소 비정(批正ㆍ비판하여 정정함)했다는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역사 인정이다. 역사에 근거하지 않은 동구청의 조약 체결식 재현 행사나 두 곳에 각기 세운 '체결지' 비를 거두어들이자는 것이다.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할 것이 없다.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당당한 일이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