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객원교수

초겨울 바람에 나부끼는 조기들을 바라보니 문득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전담 취재하던 현역 기자시절 그와의 오랜 인연이 떠올랐다. 이 나라 정치사 상 가장 큰 격변의 시기였던 1979년, 필자는 언론사 정치부 기자로서 당시 야당인 신민당을 출입하고 있었다.

그 해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 총재로 선임되었는데 나는 그것이 김 총재와 신민당에게 영광의 길이 아니고 고통스런 드라마의 서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당시 YS를 제거하려는 정권이 거액의 자금을 살포하며 경쟁자를 지원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정권의 모진 탄압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3개월 뒤 신민당사는 농성중인 근로자들을 해산하려고 진입한 2000여 명의 전투경찰들로 쑥대밭이 되었는데 농성현장에서 취재기자들과 밤을 보내던 최대 야당의 총재는 폭력속에 무기력하게 끌려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정치적 투쟁으로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무력감에 빠졌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 해 10월 초 여당은 YS의 외신기자 인터뷰 내용을 들어 국회본회의장을 무술경위들로 장악한 채 그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해 버렸다.

이규민 연세대 객원교수
야당 총재가 국회에서 무력으로 쫓겨나는 현장에서 나는 더 깊은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제명은 부마사태를 불렀고 청와대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이 대책을 놓고 날카로운 대립을 벌이게 만들었으며 그 갈등이 끝내 국가원수를 시해하는 10·26사태로 이어졌으니 YS는 한국정치의 큰 물줄기를 바뀌는 초석이 된 셈이다.

10·26사태 직후 3김 씨가 모두 대권의 꿈에 부풀던 시절 그의 성품을 느낄 수 있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교동 자택에서 아침 식사를 하자고 불러 나는 밥을 굶고 동교동에 갔다. 서재에서 만난 DJ는 흰 짐승털이 덮여진 큰 의자에 앉았고 나는 책상 맞은편에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에 앉아 차만 한 잔 마시며 인터뷰를 했다.

며칠 뒤 YS가 상도동 자택에서 아침식사를 하자고 했다. 동교동 경험이 있던 차라 이번에는 밥을 든든히 먹고 갔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온돌방이어서 YS와 나는 같은 높이에 앉았다. 그리고 인절미와 야채된장국 그리고 과일이 가득 차려진 상이 들어왔다. 그날 나는 아침을 두 번 먹느라 고생을 했지만 과장이 없는 그의 순박하고 진솔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듬 해 나는 신군부에 의해 신문사에서 강제해직 당했고 YS는 다시 탄압의 고행 길을 걷게 되면서 우리는 오랜 기간 서로 볼 수가 없었다. 군정종식 후 YS가 대통령에 당선 되었을 때 나는 8년 만에 언론사로 복귀가 허용된 후였다.

1995년 김 대통령이 유엔총회연설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뉴욕특파원들과의 조찬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식탁 맞은편에 앉았던 그에게 16년 전 야당 총재 당선 후 첫 행사로 거제도 생가를 방문했을 때 배 위에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드렸는데 그 때 YS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감개무량한 듯 당시 상황을 크고 높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모습은 대통령직보다 야당총재로서 민주주의를 향해 진군할 때가 더 자랑스러운 듯 보였다. 그만큼 국가원수자리를 힘들어 하는 것 같아 공연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찬이 끝난 후 김 대통령은 나를 숙소로 불러 어디서 들었는지 당시 큰 수술을 하고 투병 중이던 집 사람의 안부를 상세히 묻고 격려하여 주었다.

내가 YS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서거를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다. 고인의 인생역정을 보면 그는 자신에게 '이로운 것' 보다 국가에 '의로운 것'을 찾아 스스로 고행을 한 위인이라 그를 존경하는 것이다. 결단의 순간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에게 고통스럽지만 민주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의로운 길이었다. 그는 통합과 화합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그것은 생전의 YS가 실천해 온 소신이기도 하다.

박정희대통령 서거 때 빈소방문에 반대하는 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는 "하나님은 원수까지 용서하라고 했는데 그가 원수인가" 반문하며 조문을 강행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청문회 때 그를 위증으로 고발해야 한다는 의원들을 만류하며 "나는 이미 마음으로 그를 용서했다"고 말했다. 평생 정적으로 살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화해도 YS가 병중의 DJ를 문병하면서 이뤄졌다. 그는 이렇게 포용력 있는 큰 지도자였다.

고인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신한국' 건설을 제시했다. 그가 통치철학으로 삼았던 '신한국'은 '정의롭고 풍요로운 공동체, 인간의 품위가 존중되는 문화적 삶, 새로운 문명의 중심에 우뚝 선 나라, 세계평화와 인류 진보에 기여하는 통일조국'이다.

우리는 오늘 인내와 불굴의 정신으로 이 나라에 민주주의를 안겨준 지도자를 영원히 보내지만 그는 하늘나라에서 우리 국민이 언젠가는 누리게 될 그의 소망, '신한국'건설을 향한 노력을 응원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고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