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시인
김학균 시인

놀기에 바쁜 초등학교 학생들은 거의 어머니의 꾸중 듣고 자라지 않은 아이 없을 거다. 아마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게 성장하며 그렇게 성인이 되었을 성 싶다. 이 꾸중으로 자식농사 한 번에 망치는 부모가 의외로 많은 것이다.

"이제부터 엄마랑 새끼손가락 걸고 맹세하자.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는거야 알겠지?"하며 도장 찍고 복사(스캔)까지 우리는 흔하게 아이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공부와 놀이가 두 동강이 난 채 아이의 일생을 통해 공부는 어느새 지겨운 것이 되고 노는 것은 즐거움의 전부가 되는 것이다.

공부(工夫)란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선어록(禪語錄)에 보면 참선에 전력함을 의미한다. 자연과 인생을 배우고 익힘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기꺼이 즐겁게 행하는 것이다. 어릴 땐 수학놀이로 공기 돌을 빼고 더하는 놀이였는데 어느 때부터 놀이는 없어지고 수학만 남아 골치를 썩히고 지겹기 시작한다.

보름전 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대학에 가려는 첫 시련의 단추를 끼운 그들이 염원하는 것 가 이루었음 좋겠다.

직장인들은 대개가 자기 근무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많다. 삶의 의미와 보람을 자기의 일에서 찾기란 매우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과제, 따분한 감정노동, 근엄한 상사의 눈초리는 둘째치고 구조조정에 어떻게 견딜까하는 불안심리, 한마디로 재미있는 일은 동떨어져 멍 때리기에 끝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지겹고 힘든 것은 회의시간, 회의실에 들어가면 회의가 들고 만다. 이 후 퇴근 시간 회식이라도 할라치면 전부 언제 그랬냐는 식의 웅변가로 변한다. 그래서 탄식의 말이 나오기 마련 '아! 회의를 이 회식장소에서 하면 어떨까' 그러나 장소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중간에라도 간다" 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이 마음 한 쪽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못 된 우리의 격언처럼 되버린 적극성의 결여가 문제리라.

수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그 어려운 조직(직장)에 들어온 인재들이 한국병에 걸려 '침묵은 금이다'라는 생존의 명제를 배우게 되니 뛰어난 인재들이 둔재로 변하니 할 말 없는 것이다.

'조직'이란 뭔가? 하는 회의 뒤 도대체 이럴거라면 왜 나는 인생을 허비하며 사는가 하는 낙심, 직장인들의 공통 심리가 아닌가 한다. 정말 직장의 재미란 가출한지 오래됐고 "즐겁지 않은 직장이라면 당장 때려치우라"고 한 말이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결의 실마리는 인간 존중, 직원의 존중에 있는 것 아닐까한다. 쉽게 나오는 상사의 말로 가장 싫은 말인 즉 "일 안하고 놀기만 했냐"라는 말이 있다. 물론 얼마나 창의적으로 일했느냐가 문제이지만 재밌고 즐겁게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모든 직장인들도 사람이거늘 마찬가지다.

'정부 3.0'이라는 캐츠플래이즈를 들고 나온 현 정부는 '척척 정부, 착착 일처리'라는 구호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즐거움이 없는 곳에서 '창조'란 좀 멀지 않을까. 어느날 갑자기 가출한 재미를 찾아오는 일이야말로 창조의 근사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일의 정의는 '힘든 재미'다. 물론 재미만 있고 힘이 안 들면 오락일 테지만 힘도 들고 땀 흘리며 게다가 재미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에 솔솔 봄바람이다. 짧은 너, 나의 인생 두 가지 축은 바로 의미와 재미 아니겠나. 의미는 있는데 재미가 없다면 능률은 정말 없는 것이다.

화엄경 불이사상(不二思想)의 개념처럼 모든 것은 둘이 아니라 일과 재미도 둘이 아닌 하나로 같이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근거를 지배해 온 생각의 근거는 '무엇이든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캔(can)의 경영이었다. 이제 시대는 감성과 창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며 무엇을 할 수 있는 눙력도 편한 마음과 즐거운 일터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에게 즐거운 회의, 지겨운 회식은 올 것인가? 와야만 할 것이다. /김학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