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수필가

70년대 산업현장 또는 공장서 일하던 청춘남녀를 비하시킨 '공돌이 공순이'란 신조어가 출현됐다. 또 대학 공대생에게도 공돌이의 속어가 한참 동안 회자되기도 했다. 당시 여대생들도 공대생보다 법대생의 인기가 높았다.

한편 우리 부모들은 여럿 아들 중, 영리한 아들 하나만 '선택과 집중'하고, 나머지 아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하나만 잘 풀리면 나머지도 풀린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S대 법대만 합격하면, 소 팔고 눈밭 팔아 가르쳐 사시나 행시만 합격하면 부모도 영웅시되고, 몰락한 가문의 영광도 되찾을 수 있었다. 고시 합격은 그 자체가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한 신화였다.

돌이켜 보면 6·25 전쟁 직후, 농어촌 출신 청소년층은 대부분 초교만 졸업하면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어린 나이에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때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물론 도시 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일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70년대 10대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도시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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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농어촌은 차츰차츰 공동화 현상이 시작됐다. 특히 구로공단과 부평공단에는 8 도서 올라온 또래들과 사귀면서, 첫사랑의 추억도 만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불평불만 한마디도 않은 채, 사장과 사업주가 시키는 대로 일에만 몰두했다.

실제 꽃다운 나이에 삶의 애환이 서린 공간이었다. 그들의 월급은 쥐꼬리만큼 적었지만 그것마저 감지덕지 여기면서, 저금통장에 한 푼 두 푼 쌓여간 재미가 솔솔 했단다. 그때 생활상과 오늘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달라졌다.

요즘 신세대는 옷 신발 가방 등 유명 브랜드가 아니면 착용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검정 고무신을 신고, 무명옷을 입었던 세대는 자손들 요구를 다 들어주고, 자신들처럼 생고생을 안 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묻어난다. 그들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따라서 우리 젊은이들은 노년층에 진정 감사할 줄 알고,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게다가 숭고한 희생의 가치가 사장이 되어선 안 된다.

세상은 아무 노력도 없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실제 온종일 공장서 일하고 돌아와 작은 골방서 생활하면서도 먹고 싶었던 것도 안 먹고, 입고 싶던 옷도 안 사 입고, 그저 악착같이 절약하고 저축했다. 그래서 일명 '짠돌이 짠순이'이라고도 불렸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에, 오늘날 풍요한 세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촌도 놀라워하며 부러워했다.

한때 얕잡아 부르던 공돌이 공순이들 덕분에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인으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어느덧 그들은 초라한 노인이 됐다.

참으로 고달프고 힘든 세월을 참고 견뎌온 자랑스러운 주인공들이다. 이제는 곤궁하던 보릿고개의 시절이 전설처럼 세월의 뒤안길로 비켜섰다. 하지만 세상사는 호사다마라 했던가. 우리 사회에 번져있는 지역감정은 치유할 수 없는 고질병이 되고, 독재와 친일의 뿌리는 깊어졌으며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그래서 배부른 지금보다 인정미가 넘쳤던 가난했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걸까. 한편으로 한 시대의 세찬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 온 지인이 있다.

나와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구모(61)씨가 직접 겪은 실화는 이렇다. 그는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17세 나이로 호주머니에 5000원을 깊숙이 넣고 무작정 상경, 영등포 소재 이불과 침대 시트를 만든 회사에 취업한 후, 직장 동료였던 아내를 만났으니 금상첨화였다.

당시 숙식은 제공받았지만, 첫 월급을 1만6000원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두 번째 직장은 인천시 소재 새한자동차회사 공장이었다. 78년 5월 조립공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입사원서를 낸 게 평생직장이 됐다. 첫 월급이 6만8000원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일하는 동안 숙련공이 되어 차츰 월급도 늘고, 잔업도 많이 하여 알뜰살뜰 모아 연립주택도 사고, 두 자녀를 대학도 보내고 결혼도 시켜 부모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한 후, 지난해 37년 동안 일했던 회사서 퇴직하면서 마지막 받은 월급은 40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신변 정리를 마치고, 꽤 많은 퇴직금을 쥐고 홀연히 귀촌했다. 감, 포도, 사과 재배로 짭짤한 소득을 올리는 농촌마을 산 중턱에 전원주택을 지었다.

앞마당 한쪽에 텃밭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 잔디를 깔아 쉼터를 조성했다. 그는 강호 지인(江湖之人)되어 자연경관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나는 함께 이틀을 보내고 영동역으로 나와 헤어지려고 할 때, 만약 마음이 심란하고 답답하면 언제든지 와서 내 집처럼 편하게 쉬어 가라는 정겨운 한마디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