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장 HK연구교수
이화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장 HK연구교수

연구자의 본업과 무관하게 얼마 전부터 취미 삼아 시작한 작업이 있다. '월 프로젝트(Wall Project)'라고 이름 붙인 이 작업의 폴더에는 내가 직접 찍었거나 여기저기에서 갈무리해둔 벽 사진들이 보관되어 있다.

벽을 수집하는 취미라고 불릴 만도 하겠으나, 벽이란 수집될 수 없는 것이다. 벽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지면, 그것이 가지고 있던 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의 둘레를 형성하고, 이쪽과 저쪽을 나누고, 통행을 가로막고 단절시키며, 그 공간의 관계성을 규정지어 버리는 벽은,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거기에 있어야만 벽이다. 그러니 나의 이 새로운 취미는 벽을 기록하는 작업이라고 해두는 게 좋겠다.

벽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13년 12월 한 대학생의 대자보가 전국에 몰고 온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이었다. 학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 게시판에 붙여진 대자보는 그저 안녕할 수 없는 '하수상한 시절'에 가장 일상적이고 친숙한 안부 인사로 12월의 을씨년스러운 날들을 뜨겁게 달구었다.

서로의 안녕을 묻는 일 그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 되고, 그렇게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고 또 묻는 대자보를 붙이는 일이 삽시간에 전국의 대학가로 번져나갔다. 그 열기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널리 그리고 빠르게 확산되어서 고등학생이나 직장인, 심지어 정치인들도 그 열풍에 동참했던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1980년대 대학가의 대자보 문화나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 시기 '다지바오(大字報, dazibao)'의 역사가 재조명된 것도 '안녕들 하십니까'의 효과였다고 할 수 있겠다.

블로그, SNS, 팟캐스트, UCC 등 개인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가 이미 일상의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자리 잡았고, 젊은 세대일수록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대학가에는 굳이 손으로 쓴 대자보가 힘이 있는 미디어로 부상하는 것일까.

매스미디어에서는 매일 새로운 뉴스가 흘러넘치고,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는 우리가 그때그때의 핫이슈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는데, 대자보 속에서 울려나오는 이 여러 갈래의 목소리들은 무엇을 더 알리려고 하는 것일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연예인의 시시콜콜한 연애사까지 알고 있는 마당에 도대체 우리가 모르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중요한 것은 대자보 안에 씌어진 정보나 의견만이 아닐 것이다. 이 원시적인 미디어는 메시지 그 자체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에 주목하게끔 한다.

대자보 위의 다양한 손글씨체들은 그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시화하고, 어딘가에 붙은 대자보를 촬영한 사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포된다고 해도 대자보가 장소 특정적인 미디어(site-specific media)라는 사실은 여전히 중요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자기의 의견을 직접 개진하고, 빠른 시간 내에 널리 유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자보는 이렇게 '손쉬운' 방법이 아니라 좀 더 수고로운 방법을 취함으로써, 가상이 아닌 실재에서 어떤 물리적인 공간을 '공통의 것'으로서 공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산책로와 조경이 늘어나고 있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에서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광장과 빈 터이다. 반드시 어떤 벽과 결합해야만 미디어로서 기능할 수 있는 대자보는 광장 대신 벽을 새로운 만남의 장소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월 프로젝트'는 대자보와 같이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대안 미디어에 대한 단순한 관심에서 시작되었지만, 고현학을 하듯이 의식적으로 벽의 기록을 수집하다 보니, 익명의 존재들 사이의 소통이 시작되는 잠재성의 공간으로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벽의 의미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 <위로공단>에서 김진숙의 인터뷰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던 그때, 우연히 그녀의 눈에 들어왔던 벽 위의 낙서. 누가 남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방을 거쳐 간 수많은 폭력의 희생자들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적어놓았으리라 짐작되는 그 문장은 "살아서 나가자"라는 것이었다. 누가 보라고 쓴 것도 아닌 이 문장이 그 순간 그녀에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어넣어주었다는 것은 벽 위의 메시지가 갖는 힘과 울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이화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장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