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솔 청년문화기획자
▲ 이미솔 청년문화기획자

2013년부터 미술계는, 예술인복지법과 예술인복지재단이 등장하면서 예술창작에 매진할 수 있는 복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꾸준히 과정을 밟고 있다.

더불어 미술계의 요청을 반영하여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미술 분야에 표준계약서를 보급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14~2018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많은 젊은 작가와 관련 종사자들은 이러한 계획들이 졸속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예술인 복지를 위한 다양한 방안들 앞에서, 예술관련학과를 나오지 않은 예술가 송호준은 연초 한 예술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누가 예술가이며, 예술을 하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술인'만 특별히 어려우니 도움을 준다는 그리고 도움을 줄 방법을 고민하는 '예술인 복지법'은 거부하겠다."

같은 책에는 "예술은 고귀한 노동이다"라는 제목의 글도 함께 실렸다. "마치 제 몸을 제단에 바치는 듯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 앓았다. 고귀한 노동은 비싸야 한다."가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다. 앞 내용에는 여지없이 심신 고단한 삶을 살다 간 고흐의 고귀한 영혼을 드러내는 편지와 예술이 소개되었다.

상기 두 필자는 활동 배경이나 세대, 입장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술인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불린다. 이 둘 사이에도 다양한 층위의 입장을 지닌 작가들이 있다. 예술계나 예술인복지재단 내부의 논의에서도 보편적 복지로 접근할 것인가, 선별적 복지인가가 주요 논점의 하나인데 아직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보편적인 사회 복지 차원에서 예술가를 지원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예술가이기 때문에 비예술가와 별도의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혹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서 돈을 못 버는 이들에게 왜 세금을 쏟아 붓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대중에게 스스로 좋은 예술 작업이나 작품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법하다. 온갖 수상이나 타이틀 없이는 유통은커녕 노출되는 것조차 어려운 구조도 이런 현상에 한몫한다.

하지만 여기에 예술의 가치를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쏘아붙이는 일은 퍽 무책임하다. 자위 수준을 맴도는 예술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내면과 자아는 자신을 둘러싼 것을 폭넓게 이해할 때 더욱 깊어진다.

그런데 자신과 자신의 사고를 온전히 포함하는 사회 환경에 관한 몰이해 속에서 좁을 수밖에 없는 '나(만)의 내면'을 고귀한 예술적 가치로 삼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사회가 비용을 지급할 이유가 있을까?

임흥순 감독의 영화 <위로공단>은 지난 5월 세계적 미술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의 은사자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미술계의 뉴스로 그치지 않고 다양한 매체에서 뉴스로 다뤄졌다. 사회적 공감을 불러오는 소재를 담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정치적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문제의식을 호소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와 달리, 특정 집단이나 대상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술이 꼭 사회, 정치적 발언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이면서 그 개념을 떼어내고도 광범위한 울림을 전해주는 경우가 있다.

임흥순은 흔히 영화감독 겸 미술가라고 소개된다. 누구라도 영화감독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미술가는 어떤가? 조각가, 화가, 디자이너 등은 좀 더 구체적이다.

하지만 많은 미술가가 이해하기 쉬운 범주로 구분되어 불리는 것을 거부한다. 지향점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계를 흐리고 넓히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술이라는 이름만으로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미솔 청년문화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