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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호

1945년 중구 중앙동서 창간 … 친일청산·여성인권 관심
1973년 1도1사 통폐합 … 경인일보 "지령 승계" 억지
대중일보 사옥앞 정신계승 기념 … 원상복구 촉구 방침


오늘, 10월7일은 광복 이후 인천 최초의 민간 정론지 <대중일보> 창간70주년을 맞는 날이다.

<대중일보>는 광복의 기쁨이 봇물처럼 터져 흐른 1945년 10월 7일 인천 중구 중앙동에서 창간한 '인천의 신문'이다.

인천 언론의 효시인 <대중일보>는 자본금과 인쇄 보급망 등 신문사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던 매우 견고한 신문사였다.

<대중일보>의 논조는 창간사에 잘 나타나 있다. 창간사는 '우리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부면이 일직이적의 수중에서 왜곡되고 양탈되고 말살되었던 것을 인제야 우리 손으로 낱낱이 탈환해 새로운 토우에 건설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위대한 임무가 우리의 두 어깨 우에 지여진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 종간호


또 '오직 불편부당의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우리는 만천하 독자에게 공약하는 바이다.', '인천은 우리 수도의 관문이며 동시에 공업산업의 심장부인 만큼 대외적 교역이 이로조차 번창하고 국내적 생산이 융성할 것이니 국가와 함께 본지가 같이 성장하면서…'와 같이 정론직필의 정신, 인천의 언론이 정체성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는 우리민족이 끈질긴 독립투쟁을 통해 마침내 광복을 이뤘으니 일제강점기 악랄한 탄압으로 입이 있어도 말 하지 못 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 하는 식민지의 설움에서 벗어나 펜으로서 세상을 밝히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대중일보>는 '민족 반역자 처단' 즉, 친일 세력 청산에 관심을 가졌으며, '해방운동 36년사'와 윤봉길, 이봉창 등 '3열사 추념기' 등의 연재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다. 창간 초기 '말살하자 왜말, 바로잡자 우리말'이란 캠페인성 기사를 게재하고 좌담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글 반포 오백세돌날'에는 제목을 포함한 모든 지면을 한글로 제작하기도 했다. 여성 인권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1945년 12월25일자에는 '우리 여성도 완전 해방하라'는 기사를 실었으며 같은 해 11월13일자엔 '여기자 1명 모집'이란 여기자 공채를 알리는 사고(社告)를 내보내기도 했다.

▲ <인천신보> 발행인 송수안과 편집인 이종윤의 사진. 오른쪽은 <인천신보> 사옥 전경

<대중일보>의 초대 사장은 외과의사 고주철이었다. 그는 문화사업 후원자로도 평판이 좋은 거부였다. 편집인을 맡은 송수안은 일제강점기 말 <매일신보> 인천지국장을 지낸 사람이었으며, 인쇄인 이종윤은 일본에서 첨단 인쇄술을 배워 인천 인현동에 선영사란 인쇄소를 운영하다 <대중일보> 창간에 뛰어 들었다.

이들은 모두 인천사람으로 인천발전과 인천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발로 뛴 인천의 1세대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일보>는 이후 <인천신보>(1950)-<기호일보>(1957)-<경기매일신문>(1960)으로 제호를 변경했으나 논조나 구성원은 그대로 이어갔다. 제호를 바꾼 것은 영업전략이었다. <대중일보>의 후신 <경기매일신문>은 그러나 1973년 역사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다. 100만 인구가 사는 인천에 터를 잡고 27년 간 9018호의 신문을 발행했던 인천의 유력지가 군사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힌 것이다.

1973년 유신정권은 '1도1사'란 언론통폐합을 단행한다. 말 안 듣는 언론인들에겐 채찍과 순순히 협조하는 언론인들에겐 '당근'을 주겠다는 의도였다.

결국 진보적 색채를 지녔던 <경기매일신문>은 수원의 <연합신문>에 흡수된다. 이때 인천 언론의 한 줄기인 <경기일보>도 함께 통폐합된다. 인천의 2개 언론사를 흡수한 <연합신문>은 신문명을 <경기신문>으로 개칭하며 1973년 9월1일 창간호를 발간한다. <경기신문>은 이후 2차언론통폐합이 진행된 이후인 1982년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꾸고 지금까지 발행해 오고 있다.

그런데 <경인일보>가 지난 2013년 느닷없이 <대중일보> 지령을 승계한다면서 창간연도를 1945년으로 앞당기더니, 2년 뒤인 올해는 창간일까지 대중일보의 창간일인 10월7일로 변경하면서 <경인일보>의 창간 70주년을 맞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13년부터 인천시민단체와 인천의 언론인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해 왔다. 이는 <대중일보>의 성격이 민관주도의 진보적이었던 반면, 통폐합된 <경인일보>는 유신치하의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논조 자체가 정반대인 것이다. 여기에 지역적으로도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던 <대중일보>가 수원이 본사인 <경인일보>의 전신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자발적인 통폐합이 아니라 강제통폐합이었다는 사실이다.

▲ <대중일보> 출신 언론인들은 통폐합 뒤 대부분 파산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대중일보> 창업자이자 인쇄인 이종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언론 가업을 잇고 있다. 아들 고 이벽 선생이 <대중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이벽 선생의 차남 이훈기씨(OBS 노조위원장)가 언론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사진은 고 이벽 선생이 1947년 <대중일보> 기자 시절 인천기자단 결성식 후 동료들과 함께 촬영한 모습.
만약 1973년 통폐합 당시 <경기매일신문>이 <연합신문>에 자발적으로 통합됐다면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통폐합이지 사실상 강제 폐간되고 그 인천의 자본이 고스란히 <연합신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는 심하게 말하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합의 하에 병합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는 나라를 빼앗긴 것이지, 다른 나라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경기매일신문>이 강제 통폐합된 뒤 언론자율화가 시행된 1987년까지 인천은 암흑의 15년을 보내야 했다. 1988년 언론자율화가 됐을 때 인천사람들은 "우리도 이제 우리의 신문을 갖게 됐다"며 광복의 기쁨 이상의 기쁨을 누렸다고 원로언론인 김상봉 선생은 말한 바 있다.

<대중일보>가 자랑스런 인천의 역사이자 인천언론의 효시라고 말하는 키워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1945년 창간했다 1973년 폐간된 <대중일보> 70주년을 맞아 인천사람들이 7일 오전 11시 기념식을 갖는 것은 이같은 자랑스러우면서도 아픈 역사를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경인방송, NIB(남인천방송), 인천뉴스, 인천in, 시사인천, 인천일보로 구성된 '대중일보 70주년 기념사업회'는 이날 오전 인천 중구 신포동 구 대중일보 사옥 앞에서 기념식을 갖는다.

인천의 언론인들은 이날 인천의 언론인 <대중일보>의 정신을 계승해 앞으로 지역의 발전과 지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론직필 정신을 살려 가겠다는 다짐을 갖는다. 또 <경인일보>의 <대중일보> 지령승계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원상회복을 촉구할 예정이다. 원로 언론인들이 참여해 <대중일보>가 인천시민들에게 어떤 신문이었는가를 설명할 예정이기도 하다. 많은 지역의 원로들은 "<대중일보>가 인천의 신문임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천의 언론인들이 <경인일보>의 <대중일보> 지령 승계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언론사간의 사세 다툼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인천의 역사, 인천언론사를 바로 잡자는 것이 진정한 취지인 것이다. 지난 2013년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주체가 인천지역 30여개 시민단체였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인천역사 왜곡' 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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