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학성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교수
▲ 임학성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교수

인천이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이다. 한국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각자 국가를 세웠는데(기원전 18년), 비류는 한강 유역에서 나라를 세워 함께 경영하자는 신하의 권유를 뿌리치고 인천으로 와 '미추홀'을 건국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위 건국설과 함께 또 다른 건국설이 기록되어 있다. 비류가 모친 소서노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동생과 함께 미추홀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위 두 건국설은 비류(인천에 건국)와 온조(서울에 건국)가 각기 다른 국가를 건설했다. 반면 비류와 온조가 함께 인천에서 하나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인천에서의 미추홀 건국 사실만큼은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 비류가 도읍지로 적합한 한강 유역을 거부하고 바닷가 인천을 도읍지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쉽게도 삼국사기에서는 비류의 바닷가 선택 이유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고 대신 미추홀이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다"고만 그 망국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석기시대 이래 인간사회 발전의 큰 동력이 소금 확보와 해상교역에 있었음은 학계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비류 또한 위 두 발전 동력을 확보하는 데 천혜의 조건을 갖춘 인천을 도읍지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비류는 한국 최초의 '해양국가'를 인천에 건설하려 했다고 하겠다.

인천이 가진 해양도시의 정체성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에도 다시 입증된다. 4세기 후반(370)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중국에 들어가는 육상교통로가 막히자 백제는 인천의 바닷가에 항구를 건설하여 해상교통로를 열 수밖에 없었는데, 그 항구가 바로 연수구 옥련동의 '한나루'(大津, 漢津)였던 것이다.

한나루는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는 475년까지 무려 1백여 년간 해상교통로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항로는 '한나루(인천)↔덕적도(인천)↔산동반도 등주·내주' 루트로 이 항로는 지금까지도 이용되고 있다.

인천 지역이 고구려와 신라의 영역에 들어간 이후 해양도시의 정체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강화도와 교동도 및 자연도(현, 영종도)가 해양거점의 주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 예성강을 끼고 있었던 까닭에 예성강 초입에 위치한 이들 섬이 해양 방어 및 객관(客官)으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획득한 태조 왕건과 해상무역을 통해 주요 국부(國富)를 얻은 고려 왕실의 입장을 감안하면, 인천 앞바다에 자리 잡은 섬들은 해양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인천'(仁川)이라는 지명도 해양도시로서의 정체성이 담지된 것이었다. 1413년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이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규모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에 '주'(州)가 붙은 고을을 '산'(山) 또는 '천'(川)으로 고쳐 부르게 했는데 이때 '인주'(仁州)가 '인천'으로 변경되었다.

대상이 된 60개 고을 중 '산'으로 고쳐진 곳이 36%, '천'으로 고쳐진 곳이 64% 정도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천'으로 고쳐진 고을은 대체로 바다에 접해 있거나 큰 강을 끼고 있는 지리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인천의 경우 고을의 서쪽과 남쪽 양면이 큰 바다와 접해있었기에 '천'으로의 개명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조선왕조가 성리학적 인식 및 질서를 토대로 국가를 운영하여 그 이전까지 유지되어 온 해양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크게 축소됐지만, 그나마 인천 지역은 그 해양 정체성이 인정된 경우라고 하겠다.

이처럼 전 근대 시기 인천이 지닌 해양 정체성은 1883년 인천의 자그마한 포구 제물포가 개항하여 근대적 규모 및 시설을 갖춘 국제항구로 변모하면서 '해양도시'로서의 역사적 정체성을 유지함은 물론 발전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19세기 말 인천은 비류가 꿈꿨던 해양국가(도시) 건설을 재도전하는 시기였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향후 인천이 중점적으로 추진할 정책 방향은 자명하다. 서울에 인접했다는 이유로 그 동안 지녀온 내륙/국내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해양/국제 지향적 사고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굳이 선후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겠지만, 인천 지역에 속한 150여 개 섬들에 대한 기초적 조사·연구 및 활성화 콘텐츠 개발 등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물론 이러한 작업들은 옛 역사 사실에서도 입증되듯이 동아시아적 구조 틀에서 이루어져야함이 필연이다. /임학성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