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선친의 호방한 성품 탓에 당신이 어디든 갈 때마다 필자를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쉰 가까운 나이에 본 늦둥이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고, 윗저고리에 품고 다니셨어도 답답해하지 않으셨을 거란 생각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얘기다. 단출한 살림살이였을지언정 때마다 한보따리 짐을 싸들고 섬은 물론, 산과 바닷가를 찾아 며칠 씩 쉬시는데 인색하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다섯 형님들도 여름만 되면 놀러 다녔고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무용담을 자랑스레 나누기도 했었다.

우림기(雨林期)에 떠오르는 옛 장면들이다. 장마라 부르기 뭣하고 정처 없이 며칠 씩 간헐적으로 쏟아 붓는 요즘 인천의 비 소식을 우림으로 표현해 본다. 그럴듯하거나 말거나, 확실히 예전 장마철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국의 여름이 분명하다.

덕적도는 아버지와 함께 여름을 보냈던 추억의 장소이다. 인천역과 올림포스 호텔 뒤편, 예전의 연안부두에서 서너 시간 배를 타고 갔던 덕적도가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가두리 양식장처럼 바다를 가둔 송도 유원지 물과는 전혀 다른 색깔의 바다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옥빛이라 해도, 쪽빛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유년의 눈동자에 맺힌 것은 하늘 색깔처럼 투명한 바다였다. 서포리 부두에서 하선해 공소로 가는 길에 보았던 뱀과 탐스럽게 영근 검붉은 산딸기가 눅눅한 공소의 내실까지 따라 들어왔었다. 며칠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내내 잠만 주무시던 어머니와 하루 종일 끼니 준비하시던 아버지, 너른 백사장을 하염없이 뛰어 다니던 형들과의 추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2년가량 여름만 존재하는 곳에서 살았다 하셨다. 버마(미얀마), 필리핀, 열대의 어느 섬(대만인지 오키나와인지 정확치 않음)을 마지막으로 징용생활에서 벗어났다 하셨다. 성당의 외국인 신부에게서 배운 영어 몇 마디가 끈이 되어서 주로 외국인 포로수용소에서 감시병 노릇을 했다 하셨다. 친구로 삼은 영국군과 미군들에게 당신의 출신지를 설명했고, 이를 이해한 포로들과 미사를 함께 드리기도 하셨다.

전쟁 말엽엔 군화와 혁대는 물론이고 푸른 바나나를 삶아 드시기도 했고 한국에서처럼 먹을 만한 나무껍질을 찾아 밀림을 헤매기도 하셨다 했다. 그래서인지 당신은 어디를 내놔도 굶어죽지 않는다고 호언 하셨고 실제로 여행을 떠나 외딴 곳에 있어도 먹을 만한 음식을 늘 어렵지 않게 장만하셨던 기억이 남아 있다.

여름이 장마 끄트머리를 분수령 삼아 본격적으로 무더워질 때면, 어렸을 적 설렘이 느닷없이 찾아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선친처럼 짐을 싸 들고 어디론가 떠나기를 밥 먹듯이 했었다. 시집 장가보낼 놈들로 성장해 버린 새끼들에게 차마 '휴'자 한마디 쉽게 건넬 수 없는 요즘이지만, 휴가나 방학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떨릴 정도로 심쿵해지고 만다.

서포리 푸른 물과 활처럼 휜 백사장은 여전한지, 백령도 사곶은 단단한 육질을 자랑삼아 웃통을 벗어젖힌 채 해변을 바라보고 있는지, 까까머리 친구 놈 따라 우럭 낚아보자고 겁 없이 노를 저어가던 시도 앞 바닷물은 여전히 차가운지. 하여튼 간에, 여름은 예나 제나 편안히 쉬거나 어디론가 한번쯤은 떠나줘야 한다는 묘한 압박감과 미지 세계에 대한 흥분이 교차돼는 절기였다.

요즘, 여느 때와 달리 인천의 섬 여행 관련 정보가 쏟아지고 있다. 시민 사회가 요구하는 섬의 재발견 내지는 섬에 대한 인식 등, 그 동안 인천과 한 몸이었으되 이질적 공간으로서 무념했던 것을 일신해보자는 뜻으로 풀이 된다. 의당한 판단이다. 인천에 살면서 바다와 섬을 등한시했던 기왕의 풍토를 벗어던질 절호의 기회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왕래가 잦아들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찾아들기 마련이다. 충돌과 과정의 변증법이 적용되지 않는 역사가 없듯이 시민사회가 우일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제가 있다. 자연의 생태보존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고 신자본주의 일체의 물욕을 억제하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수 일 째 우림(雨林)에 서 있다. 아버지로 서 있지만, 그 아버지는 아니었다. 여름 그 깊고 눅눅한 중심에 있지만 예전의 그 여름은 분명 아니었다. 모든 게 변한다는, 그 하나만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기억의 주춧돌을 어루만지면 개발이 덜 된, 가난으로 포장돼 있지만 진실성이 담긴 그 때가 더 정겹게 느껴지고 있다.

그렇다고 오래 묵힌 추억의 더께를 마냥 놔둘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해서, 이번 여름은 기회를 만들어 아버지처럼 바리바리 싸들고 섬으로 산으로, 내 삶의 터전이던 인천 앞 바닷가로 달려가 종아리라도 시커멓게 태워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