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38.시립박물관
내년 70주년 재도약 방안 모색 시점
▲ 1946년 제1회 인천초등학교 미술실기대회 입상자 기념사진. 입상자, 교사들과 함께 맨뒷쪽에 조석기 창영초등학교 교장, 황광수 인천시 학무과장, 이경성 관장(가운데 안경 낀 사람), 한 사람 건너 서예가 유희강 선생 등이 보인다. 그 너머로 '인천시립박물관'이란 표지가 선명하다.
일제강점기 말, 인천에 있던 문화예술 관련 기관은 지금의 중구 송학동 홍예문 못 미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인천공회당, 독일 무역상사 세창양행의 사택 자리의 '향토관'과 부립도서관, 애관 등 몇몇 영화관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박물관'은 한 곳도 없었다.

그 같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박물관 설립의 꿈을 지녔던 이가 훗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석남 이경성 선생이다.

우현 고유섭 선생을 흠모해 서신을 주고받으며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유지를 새겨왔던 청년 석남은 광복이 되자 주도적으로 박물관 설립에 나섰다.

1945년 9월 이경성은 미 군정청 교화국장이었던 최승만과 인천시 군정관이었던 훔펠(Hompel) 중위의 동의를 얻어냈고, 같은 해 10월 초대 인천시박물관장으로 발령 받아 구 향토관 건물을 보수하는 한편 많지는 않지만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던 유물들을 찾아 나섰다.

당시 군정청은 귀국하는 일본인에게 배낭 1개만을 허용했다.

갖고 나가려던 문화재는 모두 압류해 세관창고에 보관했는데 이경성은 훔펠의 지원 아래 이를 확보하는 동시에 부평 소재 육군조병창에 있던 철제 범종 3개와 불상 등을 찾아 소장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그와 함께 국립박물관에서 19점, 민속박물관에서 60점을 임대하고, 장석구(張錫九) 같은 독지가들의 유물도 기증받아 개관 직전에 모두 364점을 소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인 1946년 4월 l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박물관'으로서 인천시립박물관을 개관했다.

이후 박물관은 나름대로 다양한 활동을 벌였으나 6·25전쟁을 맞아 큰 시련을 겪었다.

이 관장 자신이 적 치하에 갇힌 몸으로 유물을 방공호로, 송림동 민가로 옮겨가며 지켰지만, 박물관 건물은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바로 그 날 정오 경에 포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1953년 4월 1일 시립박물관은 지금의 제물포구락부 건물로 이전해 복관했고, 1990년 5월 남구 옥련동에 청사를 새로 짓고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립박물관은 내년에 설립 70주년을 맞는다.

전국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서의 역사와 전통에 걸맞은 내일을 모색할 시점이 됐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