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35)이규보와 계양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중기의 대표적 문인이다.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다. 만년(晩年)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그에 대하여 역사학자 이우성은 "소년시절을 유혈이 낭자한 정변의 되풀이로 분위기가 살벌했던 개성에서 보내면서, 점차 분방한 성격으로 시속에 잘 영합되지 않아 불우한 생활 속에 더욱 반발적인 체질을 키우게 되었고, 중년이 훨씬 넘어서는 다시 표면적 영달과는 달리 정신적 번민과 갈등으로 피란지인 강화도에서 어두운 여생을 마"쳤다고 규정하기도 했다.

 이규보가 계양부사로 온 것도 그가 살던 시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외방의 수령들이 팔관하표(八關賀表)를 올리지 않자 그것을 문제 삼으려다가 자신만 탄핵을 받아 계양부사로 온 것이었다. 자신만 처벌을 받아 억울했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마음은 계양 땅에 가기 위해 건너야만 했던 조강을 소재로 지은 「조강부(祖江賦)」에 나타나 있다.
 
 정우 7년 4월에 내가 좌보궐(左補闕)에서 탄핵을 받고 얼마 후에 계양으로 부임하는 길에 조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이 조강은 본래 물결이 빠르고 세찬데다 마침 폭풍을 만나 온갖 곤란을 겪은 후에 건너게 되었다. 그래서 이 부(賦)를 지어 신세를 슬퍼하고 끝내 마음을 스스로 달래었다.

 (…) 새소리도 슬픈 듯 짹짹하고 원숭이 울음도 구슬픈데 넘어가는 햇빛 뉘엿뉘엿 누른 구름은 뭉게뭉게, 아무리 태수자리가 영화스럽다 할지라도 나로서 바란 바는 아니었네. 아, 이렇게 멀리 떠나는 길이 옛날에도 어찌 없었으랴. 맹가(孟軻)도 사흘 밤 자고 주(晝)로 떠났고, 공구(孔丘)도 노(魯) 나라를 떠나는 걸음이 더디었다네. 가의(賈誼)도 낙양(洛陽)의 재자(才子)였건만 비습(卑濕)한 장사(長沙) 땅에 귀양 갔었네. 성현(聖賢)들도 오히려 이렇게 되었는데 나쯤이야 뭐 슬플 것이 있으랴. 옛사람의 불우(不遇)에 비교하면 나는 또 고을의 부사가 됐구나. (…) 험한 강물 아무리 사나워도 나는 벌써 건너왔으니 무서워할 게 무엇이 있겠으며 서울을 떠났어도 오히려 즐길 수 있으니 뭐 돌아가려고 애쓸 필요 있겠는가. 출처(出處)는 맘대로 안 되는 것, 하늘이 내려준 운명을 그대로 즐기면서 선철(先哲)과 같기를 희망해야지.
 
 이규보는 맹가·공구·가의조차 타인에 의해 떠날 수밖에 없었기에 나쯤이야 대수롭지 않다며 '끝내 마음을 스스로 달래(爲賦以悲之 卒以自寬)'기 위해 부(賦)를 짓는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며 하늘이 내려준 운명을 그대로 즐기면서 선철과 같기를 희망하겠다(樂天知命兮先哲是希)고 한다. 여기서 선철을 운운하며 '하늘이 내려준 운명을 그대로 즐기(樂天知命)'는 일은 지명(知命)을 지칭한다. 공자가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됨이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섬이 없고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앎이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논어�� 堯曰)"고 한 것과 맹자가 "명(命) 아님이 없으나 그 정명(正命)을 순(順)히 받아야 한다. 때문에 명을 아는 자는 위험한 담장 아래에 서지 않는다(莫非命也 順受其正 是故知命者 不立乎巖牆之下, ��맹자�� 盡心上)"는 게 그것이다. 주자의 해설에 따르면, 지명자(知命者)는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하늘이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천명이 있음을 모르고 믿지 못하는 자들은 의리(義理)를 돌보지 않고 해(害)를 보면 반드시 피하고 이(利)를 보면 얻으려는 사람들이다. 지명자(知命者)는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하늘이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晩山煙瞑水漫漫(만산연명수만만) 저문 산 어두운 연기에 물은 길기만 하고
 灘險風狂得渡難(탄험풍광득도난) 험한 여울 미친 바람으로 건너기도 어렵네
 命薄如今遭謫去(명박여금조적거) 천박한 운명 이제 또 귀양살이 가는 길이지만
 尙難拚却望長安(상난변각망장안) 그래도 임금님 향한 마음 버리기 어렵다네
 
 위의 시에서는 「조강부(祖江賦)」에서 다짐했던 마음이 느슨하게 이완돼 있다. '장사 땅으로 귀양을 떠난 가의(賈誼洛陽之才子兮…謫長沙)'와 자신을 견주면서 '하늘이 내려준 운명을 그대로 즐기겠다(樂天知命)'며 그것을 '지명(知命)'으로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그런 다짐은 간데없고 '임금님 향한 마음 버리기 어렵다'고 한다.

 가고 싶지 않은 곳을 향해 가니 그곳의 길목은 연기에 휩싸인 듯 물길은 길게만 보이기 마련이다. 마침 미친 듯이 바람이 불어 여울이 요동치기도 했다. 이규보에게 계양은 가서는 안 될 곳, 혹은 그것을 천명으로 받아들여 가야 할 곳이었다. 조강을 건너면서 이규보의 몸은 계양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장안(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계양에서 머물며 늘 가지고 있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