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7
조우성.jpg
이름이 '동방극장'이었다. '동방(東邦)'. '동방예의지국'이라 할 때는 스스럼없이 읽다가도 따로 떼놓고 보면 낯설어 뵈는 단어다. '동방'은 '동쪽에 있는 나라'니, '우리나라 극장'이라는 뜻인데 거판한 이름과는 달리 객석이 얼마 안 되는 살롱 같은 작은 영화관이었다. ▶3층 영사실과 1층 스크린과의 거리가 가까워 스크린 자체를 비스듬히 뉘여 놓았다. 1인용 의자는 폭이 좁은데다가 스프링이 튀어나온 곳이 많아 불편했고, 검은 커튼 뒤에 있던 화장실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와 관람객의 인내를 요구했었다. ▶지금 기억하기론, 엄지손톱보다 좀 큰 청색 타일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마저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 있었으나, 양쪽 벽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풍스런 백열등이 따듯하게 불을 밝혀 그런대로 위안을 주고 있었다. 명색은 외화 개봉관이었지만 그때의 모습은 그런 수준이었다. ▶고일 선생은 유저 '인천석금'에서 "뉴스극장으로 발족해 인천 영화의 전당이 된 동방극장은 정치국 씨 사망 후 김윤복 씨가 축항사를 인계하여 홍사헌 씨에게 위임했던 것인데, 해방 후 애관과 작별하고 동방만 직영하다가 객사했다."고 전해 주고 있다. ▶대중일보 1946년 2월 11일 자에는 "고급 영화 동방극장, 홍사헌, 전화 1371번"이라는 문자 광고만이 나온다. 그 무렵 인천의 영화광이었던 경성전기 ㈜ 인천 전동변전소 직원 이광한 선생은 1946년 1월 23일자 일기에 "동방극장에 가서 '프라크 대학생'이라는 독일 영화를 보았다"고 적었다. ▶그로 미뤄보면 '동방극장'은 1946년 2월 이전에 개관했으리라 여겨지는데, 30여년을 거쳐 오면서 키네마, 문화, 세계, 인천, 미림, 오성, 중앙, 자유, 장안, 현대 극장처럼 '동방'도 문을 닫고 말아 구도심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애관극장'만이 고군분투 중이다. ▶며칠 전에 보니, 외환은행 인천지점 바로 뒤편에 있던 '동방극장'의 옛 건물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가 평지가 되어 있었다. 문득 옛 정경이 바람처럼 스쳐간다. 젊은세대들은 이곳이 인천의 유명한 극장가였다는 사실 자체도 모를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스산해진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