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27> 하연의 '인천부로가요'와 동생에 대한 정의(情誼)
삼월 삼짇날의 풍속 중에서 '양로(養老)'와 관련된 게 있다. '양로'를 달리 표현하면 '기로(耆老)'인데, 이와 관련해 고려 때 노인사설의(老人賜設儀)를 열어 임금이 노인들에게 선물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태조(太祖)부터 기로회(耆老會), 기영회(耆英會), 기영연(耆英宴) 등이 열렸는데, 주로 삼짇날(음력 3월 3일)과 중양절(9월 9일)을 택해 열렸다. 성종 14년(1483) 이후 기로회(耆老會)은 모두 삼짇날에 열렸다.

 다음은 <인천부로가요(仁川父老歌謠)>이다.
 
 門閥仁風遠(문벌인풍원) 문벌과 인풍은 멀리 퍼지고
 芝蘭奕葉新(지란혁엽신) 지초와 난초는 대대로 새롭네
 澄淸纔數月(징청재수월) 맑디맑은 날은 겨우 몇 개월이라
 蹈舞遍群民(도무편군민) 많은 백성 두루 춤추네
 養老陽春燠(양로양춘욱) 양로회하는 날 봄볕은 따뜻하고
 霑枯雨露均(점고우로균) 우로는 마른 나무 고루 적시네
 喜逢君奭日(희봉군석일) 그대들을 성한 날(奭日, 上巳日)에 만나 기쁘기에
 扶杖拜行塵(부장배행진) 지팡이 잡고 먼지 일으키며 떠나는 수레에 절하네
 
 시에 등장하는 '서술어'들은 '멀리 퍼지다, 새롭다, 춤추다, 따뜻하다, 적시다, 기쁘다, 절하다'인데, 이들은 즐거움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가문에 대한 평판이 나쁘지 않으며 지초와 난초(다른 사람들의 자제)들 또한 대대로 새로울 것이기에 지금의 늙은 상태가 결코 서러운 일도 아니다. 인생을 돌아보니 '맑디맑은 날은 겨우 몇 개월'이기에 이처럼 늙은 것도 '많은 백성 두루 춤추'며 축하해야 할 일이다.

 이 날은 작자가 표현한 대로 '성한 날(奭日, 上巳日)'인데, 음력 3월 3일로 첫 번째 뱀날이다. 삼짇날은 뱀이 동면에서 깨어나고 강남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다. 집안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후, 장(醬)을 담그거나 대청소를 한다. 동네 젊은이들이 활쏘기, 닭싸움을 하고 아낙들은 약수터나 냇가에서 화전(花煎)을 부쳐먹기도 했다.

 마지막에 있는 '지팡이 잡고 먼지 일으키며 떠나는 수레에 절하네'는 양로회가 끝나고 송별하는 모습이다. 내년의 '성한 날(奭日, 上巳日)'에 만남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그들에게 서로의 '수레에 절'을 하는 것은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예우에 해당한다.

 다음은 1421년 인천군사로 있던 동생을 생각하며 쓴 <동생 인천군사에게 주다(寄弟仁川郡事)>라는 시이다.
 
 荊樹春將晚(형수춘장만) 자형나무의 봄은 어느새 저물고
 鴒原草欲生(영원초욕생) 할미새 들판의 풀은 돋으려 하네
 蘇山明月迥(소산명월형) 소래산 밝은 달은 멀기만 하고
 毋岳白雲橫(무악백운횡) 무악산에 흰구름이 걸려 있네
 
 자형나무(荊樹)는 형제의 정(情)이 두터운 것을 비유할 때 견인되는 단어이다. 《속제해기(續齊諧記)》에 따르면, 삼형제가 재산을 나누다가 자형나무 한 그루까지도 삼등분으로 쪼개려 하자, 다음날 나무가 말라 죽었다. 형제들이 크게 뉘우치고 결정을 철회하자 자형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할미새 들판(鴒原)도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네(鶺鴒在原 兄弟急難, 《시경》 소아, 상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돈독한 형제를 비유할 때 사용된다.

 자형나무(荊樹)와 할미새 들판(鴒原), 그리고 달과 구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작자는 동생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 있다. 누구건 바라볼 정도로 밝은 달이 떴지만 그것이 멀리 있는 듯하고 산이 구름에 가려 있다는 표현이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弟兄何處共開顏(제형하처공개안) 형제는 어느 곳에서 활짝 웃을까
 西望仁山眼更寒(서망인산안갱한) 서쪽으로 인천 쪽의 산을 바라보는 눈은 더욱 희미하네
 忽有音書來示問(홀유음서래시문) 문득 소식이 와서 안부를 묻지만
 病窓遲日寂寥間(병창지일적요간) 봄날이건만 병석의 창문에 쓸쓸함만 있네
 
 하연은 동생 하결(河潔)과 만나 '활짝 웃(共開顏)'고 싶었지만, 동생이 인천군사(仁川郡事)를 맡고 있었기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병을 앓고 있었으니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끔 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오기도 했지만 그것이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만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작자의 심리를 반영한 표현이 '창문에 쓸쓸함만 있네'였던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