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있는 크리옹 호텔은 프랑스 정부의 비공식 영빈관 역할을 하는 유서 깊은 호텔이다. 엘리제궁에 인접한 곳에 공식 영빈관이 있지만 워낙 외국의 수뇌들이 자주 찾다 보니 국왕이나 대통령급이 아닌 인사들은 클리옹 호텔에 묵는다. 아직도 예포를 쏘아 올리고 의장대를 사열하는 등 의전 절차에 집착하면서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내세우는 우리와는 달리 실리외교를 중시하는 나라들끼리는 서로 의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크리옹 호텔을 선호한다. ▶JP(김종필)가 5·16 혁명을 기획하고 성공한 입장에서 '자의반 타의반'의 외유를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국무총리가 되어 1971년도에 파리에 와서 크리옹 호텔에 묵을 때 조선일보의 파리 특파원으로 있던 필자는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자의반 타의반' 외유 당시 파리에서 지낼 때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그 집을 찾아가 보고 싶다고 하기에 필자는 한마디로 "총리를 그만두고 은퇴한 후에나 찾아가 보시라"고 충고했다. ▶무정하고 살벌하기 조차했던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항상 2인자로 반세기를 버텨온 JP의 처세는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는 타협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미운 사람 죽는 것을 확인하고 아프지 않고 편하게 죽는 사람이 승자"라는 말은 JP가 그동안 쏟아낸 명언 중의 대표작이다. ▶3김 시대의 일원으로 우리 정치사를 다시 쓰게 한 JP는 1992년 대선 때 YS(김영삼)와 손잡고 호남 배제론으로 DJ(김대중)를 제압했고 1997년에는 DJP 연합을 만들어 DJ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JP와의 연합전선이 없었다면 DJ는 영원히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JP가 자신을 제외한 양김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앞장섰던 것은 5·16 군사 혁명으로 민주화가 저지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YS와 DJ의 수난에 보상한다는 자신만이 아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JP가 와병 중이던 부인을 밤낮으로 극진하게 간호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오열하는 모습은 로맨티스트 애처가로 또한 평생을 2인자로 지내온 그의 진면목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배우자와 함께 묻히고 싶어 국립묘지도 사양한 JP의 편안한 노후를 빌고 싶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