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창작센터와 예술가들 - 오십개의 방 오만가지 이야기]
5) 입주작가 심층 탐구 - 윤형민·김미란 작가
▲ 김남수 안무비평가
▲ 윤형민 작가
▲ 윤형민作 '天上 天下'.
▲ 김미란 작가 
▲ 김미란作 '꿈드로잉'.
경기창작센터 입주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창작을 고민하고, 어떻게 세상하고 소통하는 걸까? 그들의 비밀스런 창작의 방문을 노크했다. 김남수 안무비평가가 윤형민 작가와 김미란 작가를 만났다. 장소특정적 작업을 하는 윤 작가의 작품과 시간, 그리고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또 김 작가의 블로그 저널을 통한 그의 일상과 휴먼컬러와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윤형민 작가='천상천하'에 달 띄우는 감각주의자
서구 근대 이전의 상상력과 동아시아 고전 연결 작업…독창적 발상·과정 흥미만점

경기창작센터 주변의 둘레길을 오후에 걷다보면, 마치 한 마리 임팔라처럼 뛰어다니는 작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캐나다 출신의 윤형민 작가인데, 첫 인상이 다이나믹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서구적인 마인드의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캐나다에서 5년밖에 살지 않았음에도 영어발음이 확 꼬부라져서 즐거운 오해도 하게 되지만, 윤형민 작가의 작업 발상과 과정은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면이 있다.

그는 어느 날 나에게 페이스북 메신저로 문자를 보내왔다. 자신이 <천상천하 天上天下>라는 작품을 했는데, 그 작품이 '천상 天上'이라고 쓰인 한자가 물에 거꾸로 비쳐서 '천하 天下'로도 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천상'과 '천하' 사이에는 모종의 금이 가 있어서 마치 문지방처럼 경계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선명한 '천상'과 물결 위에서 일렁이는 '천하'의 날카로운 대조와 함께 설마 그럴까 싶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무슨 대수랴 싶었다.

그런데 2014년 경기창작센터 오픈스튜디오에서 윤형민 작가가 옥상에다 <천상천하>를 설치했는데, 그 물 표면에 달빛까지 드리워져 신비롭기 짝이 없는 작품이 압도적으로 출현했다. 물 위의 달, 즉 '수월 水月'은 달이라는 천체까지의 거리를 물 속의 아스라한 깊이감으로 번역돼 왜 그토록 선인들이 좋아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디지털복제 시대에도 이 '수월 水月'의 일종의 달복제 감각이 얼마나 탁월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듯이, "이론으로는 진부하나 실제로 해보면 의외로 신선하다"라는 선상을 훌쩍 뛰어넘는 숭고한 체험이었다.

비로소 윤형민 작가와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서구의 근대 이전의 상상력과 동아시아의 고전을 연결하는 비교문화적인 리서치를 일관되게 진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알프레히트 뒤러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비치는" 수정구슬 타입의 비전이 담긴 그림과 조선 세종대의 계몽적인 책 <오륜행실도>를 나란히 놓고 기기묘묘한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있었다. 역사의 시간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유사한 감각을 병치해 새로운 금속성의 느낌을 합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륜행실도> 속에서 정절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순절하는 여인들의 재현 그림이 뿜어내는 막강한 잔혹성에 착안해 서구 중세의 고문 그림과 병치시키기도 했다. 실로 이 작가는 동서와 고금을 넘나드는 생각의 모험이 매우 전면적일 뿐만 아니라 독창적이었다. 이런 타입의 작가는 보다 보다 처음일 정도로 인지적 충격이 있었다.

"이거 한번 보시겠어요?" 멘토링 과정에서 윤형민 작가가 내민 책은 루시 스미드의 였는데,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뛰어났던 비전의 세계가 현대 예술의 재기발랄한 추상과 구체가 넘나드는 작업과 거침없이 섞이는 안내서였다. 태초의 신비와 현대 및 근미래의 상상력을 함께 결합하는 시간적 태도를 소위 '동시대성'이라고 하는데, 윤형민 작가는 그런 의미에 완전히 부합하는 시간철학을 "아, 재밌겠다"라는 명랑한 한 마디와 더불어 100% 자유롭게 구사했다.

손짓의 코드로 그래픽화 시킨 촉각적인 알파벳 작업, 한자와 아랍어와 라틴어까지 마치 바벨탑을 다시 세우려는 언어의 상호적 만남 작업, 카프카의 <변신>을 세계의 수많은 언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완전히 거꾸로 다시 쓰기 작업 등등 말만 들어도 흥미만점의 작업들을 만끽해왔고, 또 하리라 생각한다.

현재 윤형민 작가는 '날 일'과 '달 월'이라는 한자를 병치해 만들어지는 '밝을 명 明'이라는 한자를 다시 물 위에 "달그림자"처럼 띄우고, 바람에 의해서든 숨결에 의해서든 표면의 잔물결이 일렁이면 의미의 날것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느낌의 원체험이 '신경자극'(니체) 타입으로 일어나는 설치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 속에서만 밝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밝을 명'이 1879년 에디슨의 전구 발명 이후 완전히 폐기된 것 같았지만, 영화감독 차이밍량이 말한 것처럼 "때때로 우리가 만나는 거대한 진리는 첨단 로봇 몇 대가 등장하는 화려한 화면이 아니라 구름이 달을 가리는 일상에 있다"는 차원에서 여전히 강렬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동시대 예술의 감각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글 김남수 안무비평가·사진 이재훈 작가


▲김미란 작가='꿈 속의 꿈' 다루는 초현실주의자
'꿈'을 재료 삼아 작업…무생물 에너지 흐름 포착 자유자재로 생명체화

지금은 꿈이 어수선하며 아침이 돼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시대이다. 모든 현실세계를 산산이 파괴하거나 꿈틀거리는 거대한 애벌레처럼 작동시키는 꿈의 힘이 이처럼 소실돼 버리는 것에 작지 않은 아픔이 있다. 예술은 상상력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것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작용을 해왔다. 프로이트는 "무릇 상상이란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꿈꾸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상상력에 이 한없이 무거운 몸을 싣고 자유로를 달려서 나비처럼 천계를 비행하는 것이 인간됨의 절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경기창작센터 레지던시에 2년여 참여해온 김미란 작가는 차츰 꿈의 세계가 몰락하고 있는 이 시대에 '꿈'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해왔다. 잠자리에 들어가면서 "이제 일하러 갑니다"라고 말했던 초현실주의 시인처럼 그는 꿈이라는 시공체가 이질적으로 발휘하는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뤄왔다. 어떻게? "쉬워요. 꿈 속에서 꿈을 꾸는 거죠. 소위 자각몽이란 겁니다." 김미란 작가는 경기장착센터라는 장소에 거주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생활의 또다른 거처는 꿈의 시공인 셈이다. 그는 꿈 속에서 "이것은 꿈이구나!"라고 깨닫는 것은 기본이고, 꿈 속에서 다시 한번 꿈을 꾸거나 꿈 속에서 해몽을 할 수도 있다. 꿈 속의 꿈에 대해서.

나에게 김미란 작가는 2000년대 중반 네이버 블로그 세계에 '오래된 숲'이라는 대화명으로 혜성처럼 등장해 깊은 정서적 침잠과 함께 무의식의 부드러운 흡수와 손길을 느끼게 해준 에세이스트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도 운영되는 그의 블로그는 꿈결이 갖는 탄력적이며 서정적인 터치로 모든 일상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마치 그의 미술 작업처럼, 그의 유영하듯 떠가는 산책길처럼.

꿈 속의 꿈을 다룬다? 최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영화 <인터스텔라>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또다른 영화 <인셉션>을 연상시키는 이 표현이 김미란 작가에게는 어떤 과정으로 나타날까.

"안산의 스틸랜드에 즐비한 공장 지대를 보신 적 있어요? 그 공장을 구성하고 있는 파이프라인과 굴뚝, 철제 빔 같은 것들이 나에게는 마치 생명체의 거대한 몸체나 촉수들처럼 꿈틀거리면서 변형되고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 작가는 불행히도 현실계에 에너지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모양을 마주하면, 바로 꿈의 자유자재가 발휘하는 생명적 정감으로 그 모양들을 괴물스런 형태로 바꾸곤 한다.

그러한 꿈의 평행세계-우리 세계와는 거울처럼 마주한 또다른 세계-속에서 김미란 작가는 자신의 길을 열거나 공간을 날아다니면서 자신의 세계를 유영한다. 그러나 어느 고비에서는 검은 구멍을 맞이하거나 고뇌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에게 경기창작센터는 꿈의 영역을 보존하는 새둥지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그 영역을 위협하는 현실계의 악이기도 하다. 그는 꿈 속의 꿈을 통해 이미 깨달음의 경험이 있지만, 그것은 종교적 영역으로 치닫기보다는 인지체험적인 미술 작업으로 나아가고 파급되기를 희망한다.

꿈 속의 꿈은 먼저 와 있는 우리의 상태인 환상과 가족의 평화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의문에 빠뜨리고 예술이 지향하는 극한 체험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처럼 느끼도록 한다고 김미란 작가는 고백한다. "나는 이 세계를 다시 깨야 해요. 나는 꿈 속의 꿈이 아니라 이 세계와 다시 쨍하게 만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해요."

김미란 작가가 자신의 생의 시간 속에서 느끼는 꿈의 현상학이 블로그의 글쓰기로, 미술작업으로 출현하는 것이 어쩌면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재앙들이 경쟁하는 이 연옥의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하겠다. "꿈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연다는 것은 (...) 역사적 각성을 통해 자연에 예속된 미신을 부수는 것을 뜻한다."(벤야민)라는 것이다. 꿈꾸기가 잠자리의 스마트폰 불빛 때문에 차츰 곤란해진 지금, 역사적 각성을 가져오는 또다른 시공의 형식을 제안받고 싶지 않은가.

/글 김남수 안무비평가·사진 이재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