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윤대성 원작 <미친 동물의 역사> 대본을 받아들고 짬 날 때마다 삼삼오오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발성연습과 복식호흡 등의 훈련을 거친 후, 필자를 비롯해 출연진 모두가 대본을 거의 외웠을 무렵. 공연심의에 통과하기 위해 경찰서를 다녀온 선배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빨강 밑줄이 그어진 부분과 지렁이 꼬리처럼 치켜 올라간 삭제 표시를 제외한 대본을 살피고 나니, 공연이고 자시고 배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절반만 남은 대본을 품에 안고 고민의 구슬을 굴려보지만 묵주처럼 꿰지거나 어루만질 수도 없었다.

1982년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선배들이 고난기여도 연극 공연(답동성당 대학생회의 '까만 곰 축제')을 위해 마른 살 비벼가며 끈끈한 전통을 이어가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분개했던 기억도 모래알처럼 분산되고 말았다. 군부 독재의 그늘에서는 모든 것이 통제되었고 저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표현들은 일절 삭제되었다. 그런 시대의 터널은 어둡고 쓰리고 공기 한 줌 통하지 않는 답답함 그 자체였다. 그나마 구멍을 빠져나온 '베이비부머'들의 뇌심에는 굴절된 암울함이 정박지의 폐선처럼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기록됐고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그 뜨거운 불덩어리를 정수리까지 이고 올라와 기어코, 아침을 밝히고야만다는 교훈을 새삼 일깨우는 시기이기도 했다.

'세상 참 좋아졌다.'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물리적인 변화와 함께 한층 성숙된 민주시민의식이 그 단면이라면 단면일 터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단면에 불과할 뿐. 다면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의 프리즘을 거치게 되면 오히려 짐승만도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도대체 무엇이 본성을 천박스럽게 만들고 짐승의 사슬을 끊지 못하게 만드는지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한 터에 침팬지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제인 구달(Jane Goodall)의, "침팬지 세계에서도 제노사이드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접하게 된다. 제노사이드(Genocide)는 인종 종교 민족을 뜻하는 제노(Geno)와 살상의 의미를 갖는 사이드(Cide)가 결합된 희랍 말이다. 그녀의 주장을 받쳐주는 충격적인 발언과 연구결과는 상상 이상의 경악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소수의 강성 그룹이 상대적으로 약한 다수의 침팬지 그룹을 집단적 살상과 함께 어린 새끼들을 식육까지 한다는 것이었고, 최종적 희열의 감정을 외적으로 표출(기이한 동작과 웃음 섞인 괴성)한다는 내용이었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고 읊조리다 반추해 보니, 오늘 날 우리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실상과 결코 다르지 않음에 연거푸 놀라게 된다.

독재와 복수는 짐승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복수를 통해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도 제인 구달의 연구 결과에 일정도 동의하는 차원에서 짐승도 인간처럼, 아니 인간이나 짐승이나 매 한 가지로 권력을 갖게 되면 미쳐간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실 예로, 기초 지자체 단체장에 당선되고 나서 전임 단체장에 힘을 실어줬거나 제 입맛에 맞지 않는 일체의 행정코드를 무지막지하게 잘라내 '꼴리는 대로' 처신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는 현상이 그것이다.
지역 주민과의 대화는 솎아낸 사람들만 초대하고, 행정 일꾼들의 바른 목소리를 옥죄어 무시해버리고, 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청사 내 식당을 폐쇄해버리고, 짐승의 '넋을 위로하는 글'이란 비문 자체가 역사적 사실과 현장임에도 자신이 믿는 교의에 어긋난다고 땅에 묻어버리고, 합법적인 계약과 정당한 위임을 부여 받은 복지시설에 제 사람 심자고 독단 처리하고, 운동 좀 했다고 약자가 대들면 '후까시'짓 해대고, 불법에 편법을 동원해 도로 한 가운데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해 놓은 것도 모자라 노랑 주차 금지선에 우회선을 멋대로 그려 놓고 등등. 아, 아. 재탕 삼탕하는 '미친 동물의 역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후대의 그 누군가(其人)를 위해 부형(腐刑)의 수모를 참아가며 130여 편의 사기와 열전을 써 내려간 사마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그 후예들은 영혼이 능지처참을 당할지언정, 하늘이 인간에게만 특별히 선사해준 기록의 선악과를 온전히 역사에 전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우리의 명절 가운데서도 첫머리를 장식하는 설이 다가올 참이다. 지역 경제가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선물 한 아름 씩 안겨주지는 못할망정 대인(大人)의 가슴으로나마, 소외시킨 다수의 의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목민관 어디 하나 쯤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