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19-차이나타운
▲ 6·25전쟁 직후의 '차이나타운'. 인천역 쪽에 본 풍경.
오늘날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고 있는 지역은 조선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船倉里)였다. 인천 개항 직후인 1884년 청국의 요청에 의하여 조계지로 내 준 땅이었다. 명목상의 지세(地稅)를 내기는 냈지만, 조계는 실상 강대국이 다투어 강점한 인천부 안의 '작은 식민지'였다.

도둑이 조계 안에 숨어들어도 조선의 관원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던 치외법권 지대로 청국인들의 기세가 등등했다고 한다. 조정을 쥐락펴락했던 원세개가 뒤를 봐 주던 청상(淸商)의 무역고가 조선을 훨씬 앞지르고, 인천 화상 '동순태'는 조선 정부에 차관을 대 줄 정도였다.

1912년 일제가 조계 제도를 폐지하면서 조계지 일대를 '지나정(支那町)'이라 불렀다. '지나정'이란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을 얕잡아 일컬은 일본식 동명(洞名)이었다. 중국인들은 드러내놓고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모욕으로 알았는데 우리는 점잖게 '청관(淸館)'이라 했다.

청국 영사관이 있어 부른 자연발생적 명칭이었는데, 1914년에 다시 '미생정(彌生町)'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엔 인천시지명위원회가 '선린동(善隣洞)'이라 개칭했다. 굳이 '선린'을 앞세운 것은 '선린'을 별로 못한 과거사가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싶은데,1977년북성동에 통합됐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양풍(洋風)이 불어 '차이나타운'이라 불리기 시작했지만, 잘못 붙여진 명칭이다. '청관'은 서양에서 '차이나타운'을 뜻하는 '동양의 이국적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창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우리는 그들과 '공맹(孔孟)'과 세시풍속 등을 공유해 왔었다.

어쨌든, '청관'은 인천 땅의 일부지만 이국인들의 폐쇄적인 섬이었고, 1931년 '만보산사건' 때는 서로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로부터 어언 130여 년이 흘렀다. 한 세기 전과는 사뭇 다르게 한ㆍ중은 주권 국가로서 수교한 후, '선린'을 다짐하는 우호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 화교(華僑)들의 지역화는 아직 미흡해 보인다. 최근 인천시립박물관이 '오래된 이웃, 화교'라는 특별전을 열고, 중구가 내년에 '화교역사관'을 개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같은 행사들이 그들을 더욱 '가까운 이웃'으로 맞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