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 16. 부평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모판
▲ 지난 1962년 8월27일 부평 새나라자동차사 준공식에 참석한 후 공장 내부를 둘러보는 군복 차림의 박정희 의장. 자동차 생산 라인이라기보다는 요즘의 공업사 수준의 모습이 당시 자동차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일환

공장 준공식 박정희 의장 참석

외국인 관광객·UN 군 주 이용

2772대 생산…대우·지엠 '바통'



인천이 지난달 말 기준으로 승용차 100만대 시대를 열었다. 시민 3명당 1대 꼴로 승용차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인천은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도시이다. 이 땅 최초의 자동차로 기록된 고종의 어차(御車) 미국제 포드 승용차가 1903년 제물포항을 통해 수입되었다. 개항장답게 외국무역상이나 선교사들이 자동차를 들여와 운행함으로써 그 어느 지역보다 먼저 자동차라는 신문물을 접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천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운 지역이다. 정부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자동차공업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킬 정책을 세웠다. 재일동포 박노정에게 인천 부평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는 것을 허가했고 드디어 1962년 8월27일 새나라자동차사의 간판이 내걸렸다.

그날 오후 3시에 열린 준공식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했다. 최고 실력자가 만사 제쳐두고 참석할 만큼 이 공장의 준공은 그 의미가 컸다. 당시 한 신문은 그날 준공식에 박 의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구름처럼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박 의장은 치사를 통해 "우수한 자동차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외화를 절약하게 된 것이 기쁘다"며 "하루바삐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태세를 갖출 것"을 당부했다. 사진은 준공식 후 공장 내부를 시찰하는 군복 차림을 한 박 의장의 모습이다. 그는 아직 군인 신분이었다.

8만평(건평 4500평)의 터에 자본금 1억원으로 출발한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의 1200㏄ 자동차 블루버드를 반제품식으로 들여와서 조립하였다. 말이 조립 생산이지 사실 나사와 볼트를 끼우고 맞추는 정도의 단순 작업이었다. 닛산은 물자 제공뿐 만 아니라 프레스 가공과 엔진 제작 등 기술 원조를 하기로 새나라자동차사와 7개년 기술협조 계약을 체결했으나 타이어 튜브, 시트, 유리 등 국산화율은 20%에 머물렀다.

일본의 '파랑새'가 대한해협을 건너 우리나라에 날아와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근대적 생산 라인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국산 승용차로 기록된다. 미끈한 세단형의 새나라자동차가 시중에 나오자 1955년부터 미군 지프의 중고 부품을 조립하고 드럼통을 망치로 두드려서 생산해 온 시발자동차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했다.

새나라는 초기에 일반인들이 쉽게 탈 수 있는 자동차가 아니었다. 처음 생산된 400대 중 150대는 외국인 관광객 전용 차량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위해 영어를 해독할 수 있는 운전수 150명을 선발해 운전대를 잡게 했다. 나머지 250대는 주한 UN군용이나 대도시의 일반 관광용으로 운행했다. 이를 위해 거리 곳곳에 새나라 전용 승하차장이 설치되었다.

새나라는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돼 갈지자 행보를 했다. 외환 사정이 악화돼 부품 수입이 어렵게 되었고 대당 수입 단가 1040달러 (당시 환율 13만1000원)의 국내 판매가가 22만4000원의 폭리로 밝혀지는 등 자동차 탄생에서부터 부품 수입 단계에 이르기 까지 각종 특혜 의혹에 휘말렸다.

새나라자동차 문제는 국회에서 주요 의제로 다뤄지면서 정쟁으로 까지 비화돼 한동안 장안을 들끓게 했다. 결국 1963년 7월 2772대를 끝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하루 10대 정도 생산을 하고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새나라자동차사는 1964년 1월31일 인천지방법원에서 경매 처분되었고 한일은행에 낙찰되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자동차의 국산화라는 거창한 꿈을 접고 1965년 신진자동차로 넘어감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 신진자동차는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 그리고 한국지엠으로 그 바통이 건네지며 오늘에 이른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