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12> 애스컴시티 부평
▲ 조병창 지역 원경(1940년대 후반).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우고 이어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감행했다. 인천과 부평은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중심에 위치해 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부평은 광복과 6·25전쟁 후에도 병참·군수와 관련한 거대한 군수공업도시로 형성됐고 이곳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애스컴시티(ASCOM)로도 불리게 됐다.

▲부평과 인천
행정구역으로의 부평은 '부평구'를 의미하지만 관념적으로는 북서부 인천지역을 의미한다. 부평은 본래 역사·행정적으로 인천과 분리됐던 지역으로 각기 독자적인 발전을 해 왔다. 계양산-천마산-원적산-만월산(원래는 주안산)으로 이어진 인천의 산줄기는 문학산을 중심으로 하는 능허대 뱃길의 해양 경제권과 계양산을 중심으로 한 부평 평야의 내륙 경제권으로 분리시켜 놓았고,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인천 지역 사람들은 부평역을 지나쳐 가는 역(驛)이라 여겼기 때문에 오랫동안 인천과는 별개의 지역인 것으로 존재했다.

개항 이후 개항장 인천은 일본인의 상업·주거도시로 변화됐고, 부평은 1914년을 기해 개항장 이외의 인천지역과 합쳐져 부천군(郡, 부평+인천)이 됐다. 1930년대 개항장 인천은 이미 포화상태에 달한 인구가 주변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또한 학교 및 의료기관, 체육시설 등 공공시설의 확충 등이 요구됐기 때문에 인근 부천지역으로 부역(府域) 확대가 불가피하게 됐다. 거기에 더해 1930년대 후반 전시(戰時)라는 특별한 상황과 맞물려 경성과 인천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지역으로 포괄해 개발하겠다는 계획이 수립됐다.

▲일본육군조병창(造兵廠)의 설치
일제는 부평의 전통적 중심으로부터 남쪽으로 수㎞ 떨어진 경인선 철도역에 '부평역'이라는 지명을 부여했다. 그 후 부평역 인근에 거주지와 은행가와 군수 공장을 집적시켜 집중적으로 성장시켰고, 결과적으로 부평역 인근이 부평의 중심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부평의 전통적 중심지를 망각케 하고, 새로운 부평을 '진짜' 부평으로 각인케 하는 요인이 됐다.

부평역(驛)에 전기가 공급된 것은 1934년의 일로 이때까지만 해도 부평은 그저 평범한 농촌지역에 불과했다. 1937년의 중일전쟁은 부평이 군수공업의 중심지가 되어가는 서막이었고, 1938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선언했다. 부평 지역의 공장들은 대부분 금속·기계공업에 속한 것이었는데 군수공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1939년 말 일본육군조병창(造兵廠, 이하 조병창이라 함)이 설립되면서 부터이다. 일제의 '조병창'은 원래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었는데 그들이 다른 나라에 세운 유일한 조병창이었다. 부지는 현재의 부평1동, 산곡 3·4동 등지에서 부평 전역으로 확대됐는데 일본인 하청업자인 다다구미(多田組), 다마보구미(玉操組) 등 5개 업자가 맡았다.

공사로 인해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부평은 급속하게 하나의 거대한 공업도시로 형성돼 갔다. 조병창에는 수천을 헤아리는 군인과 군속이 종사했으며, 조선총독부는 근로보국대를 시군별로 조직화해 하청업체에 배치했다. 조병창과 그 하청공장에 근무하면 징용을 면제해 주는 특혜까지 주어졌기 때문에 조병창을 피난처로 삼고자 하는 많은 외지인들이 부평으로 몰려들었고 노무자 집단 거주지가 도시 외곽에 조성됐다.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학생들까지 동원했는데 학생들의 사보타지로 인해 군수품 생산량이 급감하자 보성전문학교 폐교를 검토할 정도였고, 무기를 밀반출해 일본 요인의 암살기도와 임시정부에 공급하려 하기도 했다.

조병창이 만들어지자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물은 공출이라는 명분으로 이곳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전쟁 물자를 조달했던 대표적인 병기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주로 소총, 탄약, 총검, 수류탄, 경차량 등을 제작했는데, 1944년부터 종전(終戰)까지 잠수정 수요의 급격한 증가로 조선기계제작소 인천공장을 감독하며 잠수정을 제작하기도 했다.

▲애스컴(ASCOM)시티 부평
광복과 함께 1945년 9월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38선 이남의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해 미군정을 실시했다. 당시 주둔한 미군은 주둔군의 병참지원을 위한 기지로 부평조병창을 이용했다. 그 이유는 필요한 물자가 미국 본토에서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고 병참·군수와 관련한 제반 시설이 이미 충분히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미군은 주한미군 지원사령부(the Army Support Command Korea)를 설치하고 이를 약칭으로 ASCOM으로 했는데, 이때부터 부평이 미군이나 미군사(美軍史)에서 애스컴시티로 불리게 됐다. 이후 1970년대 초까지 부대를 확장해 물자·병력 이동로 역할을 했으며 당시 부평역 인근의 일부 도심을 제외한 부평 전체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로 발전했다.

부평은 광복과 6·25전쟁 후에도 보병사단, 보병여단, 공수특전여단, 군수지원사령부, 해역방어사령부, 주한미군 군수지원단 등의 군부대가 주둔하는 등 그야말로 군사적 가치가 큰 전략적 중요지역이었다. 그러다가 부평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고 경인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남동공단과 함께 인천 발전의 주축이 됐다. 그리고 종래의 전략적 기능보다는 동서 교통의 요지이자 수도권 남부와 북부를 잇는 배후지의 역할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됐고, 구도심지역과 맞먹는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지역으로 성장했다. 반면 인천은 도시의 원핵이 항만기능에 바탕하여, 서쪽의 바다와 동쪽의 부천의 존재라는 지리적 특성상 동서방향의 성장은 한계를 맞지 않을 수 없었다. 근현대 인천, 부평, 부천이 본래 같은 뿌리였음을 확인하는 것도 향후 인천 발전의 한 방향제시가 될 것 같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