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복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쌀 한 바가지를 리쿠사쿠(Rucksack)에 담아서 무작정 대부도로 떠난 것이 필자의 첫 단독 여행이었다. '륙색'이라는 말과 '대부도'란 단어를 떠올릴 때면, 두려움에 떨며 인천항으로 녹아내리는 등불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당시의 기억은 여전히 새삼스럽다. 배낭이라 부르지 않고 리쿠사쿠로 통용됐던 것도 그렇고, 새로 생긴 연안부두에서 서너 시간 배를 타고 대부도 방아머리에 내린다는 상황도, 요즘으로써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일지 모르겠다.

여하간,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떠난 여정에서 다습게 밤을 비추던 인천항의 불빛은 귀로의 심지를 꺼뜨리지 않는 중요한 단서로 남는다.

랜드마크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만드는 경관상의 지표를 말한다. 그것이 지형이든 지물이든, 역사가 깃든 건축물이든 간에 한 지역의 품성(역사)을 핵심적으로 파악하는 추출물로 이해할 수 있다. 1812년 나폴레옹의 침략을 승리로 이끈 러시아가 183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 광장 앞에 세운 기념탑은 600t이라는 무게만큼의 의미를,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에 버금갈 정도로 자부심을 갖는 이유가 그렇다.

유수의 국가와 도시로 발걸음을 내딛을 적마다, 나라와 지역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놓은 상징들을 만나게 된다.

동방명주와 황포강, 스페이스 니들과 스타벅스, 멜랑게(비엔나 커피)와 도나우 강, 오페라 하우스와 캥거루 등을 통해서 주목할 것은, 랜드마크라는 단순명사를 떠나서 지역정서와 역사를 이해함으로서 문화적 일체감을 세계인이 공유한다는 것이다. 상하이, 시애틀, 비엔나, 시드니라는 도시를 특별한 장소로 만들어 줌에 따라 랜드마크는 곧 심볼이 되며, 시민의 정체성 함양과 도시가치를 상승시키는 마력은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연수동 동막 어촌계 앞, 범좌산 서 쪽 끝자락에 성황당과 상엿집이 있었다. 동막 마을 거리 한 가운데에 우뚝하니 서 있는 느티나무는 마치 마을을 지키듯, 묵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수동 일대가 개발의 붐을 타면서 마을 사람들의 생업인 굴과 바지락 채취는, 매립의 손길과 보상의 유혹을 견뎌낼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지금도 동막을 기억하고 있는 인천의 고로들은 "온전히 인천을 재현했던" 장소로 추억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천은 바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이다. 도시 성장의 밑거름인 바다를 저버리고 시멘트 범벅인 채 신기루를 그려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됐다. 어딜 가나 비슷한 도시 체형과 문화행태는, 같은 내용의 폭력 영화를 골 백번 되감겨 보는 것처럼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일전에, 소년의 '귀로의 심지'를 달구었던 연안부두를 다시 찾았다. 러시아 풍의 탑 두 주가 생뚱맞게 동공에 박혀왔다. 러시아와 도시 협력 차원에서 합의하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조악한 시멘트로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문화 강국 러시아를 얕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시 상징물 특히, 국가 간의 신의를 바탕으로 맺은 협력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문화적 가치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룰'이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의 기념탑은 그렇지 않다. 엉성하기 짝이 없어서이다. 인천시민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순간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짝퉁을 만들어대야 만족할 것인지, 깊어지는 슬픔 한 가운데서 동막 마을 느티나무 한 그루가 무영의 가지를 흔들어대고 있다.

/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