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11> 왕도(王都)의 공간 인천①
▲ 인주이씨 본산 '원인재'
인천의 역사적 특징으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왕과 관련된 상징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비류백제의 출현이 바로 미추홀이었고, 특히, 고려시대에는 인천이씨 출신의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7대 80년에 걸쳐 왕의 고향이자 왕비의 고향이었던 곳이다. 여기에 강화도가 몽골의 침입을 맞아 제2의 수도로서 39년간 항몽(抗蒙)의 근거지가 됐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대두와 인천지역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는 하대로 오면서 점차 정치·경제는 물론 사회·사상적인 면에서 여러가지 변동을 경험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골품(骨品)보다는 실력과 무장력으로 왕위를 쟁취하는 이른바 왕위계승전쟁이 이어졌고, 골품제 하에서 최고의 지식인으로 행정의 실무를 담당했던 6두품들도 기존체제에 반발하면서 고대적인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세로의 지표를 제시했다.

그런 가운데 각 지방에는 호족세력(豪族勢力)이 등장하면서 경주 중심체제에서 벗어나 지방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고, 지역인물이 역사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이러한 변혁의 시기에 각 지역과 출신가문(家門)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성립된 것이 본관(本貫)이다. 본관제도는 호족에게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들 호족들은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중앙에 진출해 귀족(貴族)으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사 인종조 기사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호족세력(豪族勢力)은 인천지역에서도 대두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경우가 인주이씨(仁州李氏), 부평이씨(富平李氏) 그리고 강화위씨(江華韋氏)의 경우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인주이씨의 선조에 대해 명확한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선조가 신라의 대관(大官)이라는 점, 사신으로 입당(入唐)했다는 점, 당(唐)의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이씨를 사성(賜姓)했다는 것은 <이씨가록(李氏家錄)>과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인주이씨는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 때에 세 딸이 모두 문종비가 되면서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게 돼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80여년 동안 중앙정치계에서 핵심 세력이 됐다. 왕실과의 혼인관계뿐만 아니라 당시의 세력가(家)들과도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벌족세력을 형성해 고려후기까지 그 세력을 유지했다.
인주이씨 이외에도 인천지역의 호족세력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부평이씨이다. <부평이씨대동보(富平李氏大同譜)>에 의하면 부평이씨의 시조는 이희목(李希穆)으로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책봉됐는데, 이는 고려왕조의 집권력 확립을 위한 조치이기도 하면서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지역적 기반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라는 통일 후 활발한 해상무역활동을 국가적으로 보호할 필요성에서 청해진(완도)·당성진(남양)·혈구진(강화) 등에 해상군진을 설치했다. 이러한 군진세력과 서해의 해상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이 강화·교동·통진지역의 호족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강화위씨이다.<고려사>에 강화현인으로 나타나 있는 위수여(韋壽餘)는 중앙으로 진출해 문하시중에까지 올라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았지만, 그 외의 호족들은 그 성씨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왕실의 고향, 7대어향(御鄕) - 인주이씨 본산 원인재
고려시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80년 동안 인주이씨는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는데, 당시 고려 왕실의 왕자·궁주 가운데 인주이씨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인주이씨는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해주최씨·경주김씨·평산박씨·파평윤씨·강릉김씨 등 거족들과도 혼인관계를 맺어 일대 벌족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헌종 대에 조카 한산후(漢山侯)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던 이자의(李資義)의 난과 인종 4년(1126)에 왕권을 차지하려 했던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주이씨는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이자겸의 딸인 두 인종비는 모두 폐비가 됐다. 인종은 새로이 중서령 임원후(任元厚)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는데,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이다. 공예태후는 부평이씨인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공예태후는 의종·명종·신종 등 3왕과 2왕자·4궁주를 낳았다.

인주이씨가 몰락한 후에는 김부식(金富軾)·김부의(金富儀) 등의 경주 김씨가 귀족사회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그 권세는 인주이씨에 미치지 못했다.

고려 말에 이르러 공양왕은 인주(仁州)를 올려 경원부(慶源府)로 삼았다. 그런데 그 사유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는 '칠대어향(七代御鄕)',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칠대지향(七代之鄕)', 강희맹(姜希孟)의 <승호기(陞號記)>에는 '칠대향(七代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양왕은 고려 말, 무너져가는 고려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그의 7대조인 신종의 선대 7대왕 중 5대왕이 인천을 외향으로 하고 5대 왕비가 인천을 내향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조상을 높이고 알리려는 뜻에서 인주를 부(府)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읍호를 환원시켰던 것이다.

어향(御鄕)은 '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뜻을 확대해 7대 동안 인천이 왕실과 관련이 있다고 해 '칠대어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000년의 시간을 넘어, 그 땅과 공간에서 인천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되고자 꿈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