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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뮌헨 올림픽대회가 2차 세계대전 후 동·서독으로 분단된 서독에서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 조선일보의 파리 특파원으로 필자는 올림픽 취재를 위해 현장에서 취재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회가 중반전에 돌입한 9월5일 팔레스타인의 극좌 단체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했다. 이들은 선수촌에서 2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살해하고 9명의 선수들을 인질로 잡았다.

▶분단된 독일에서 개최된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대회는 삽시간에 공포의 분위기로 역전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수감자 200명과 독일·일본의 적군파 요원들을 석방시키고 그들의 안전한 탈출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독일 경찰과 안전요원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테러범들과 계속 협상을 벌였다.
▶올림픽 취재에 전력하고 있던 보도진들은 경기는 뒤로하고 선수촌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과 협상 과정을 취재하고 보도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서독 정부는 이스라엘 정부와 협의했으나 당시 골다·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테러리스트들의 요구를 한 가지도 들어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서독 정부와 협상을 벌여 이집트로 탈출하기로 했으나 막바지 작전이 실패해 인질 9명과 테러범 5명이 사살됐다.

▶그 후에 열린 몬트리올, 모스크바, L·A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됐다. 동서 간의 냉전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어서 양 진영이 모스크바와 L·A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상황에서 올림픽대회의 분위기는 긴장의 연속이었던 기억이 새롭다. 1988년 또 다른 분단국 서울에서 개최된 올림픽은 모처럼 동서 양 진영이 모두 참가하는 화합의 올림픽이 됐지만 초반에 김포공항에서의 폭발물 사건 등으로 긴장감이 계속됐다.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등 아시아 각지에서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시점에서 개최된 인천 아시안게임은 안전사고 없이 진행된 모범적인 대회였다. 대규모 북한 선수단까지 참가했던 대회에서 우리 안전요원들의 역할은 완벽에 가까웠다. 대회가 끝난 후 폐촌식이 있던 7일까지 AD 카드를 목에 걸고 근무한 이성형 남동경찰서장이 대표적인 안전 지킴이었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