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연 다지음한글구성성명학회회장
아호에 대해 독자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재미있는 사실은 부산 모 파동성명업체서는 초등학생도 아호를 지어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가 성(姓)이 나빠 이름을 개명해도 효력이 없다면서 대신 아호를 지어준다고 한다. 참으로 어이없고 기가 막힌 노릇이다.
그렇다면 아호란 무엇인가? 아호는 문인이나 예술가 따위의 호나 별호를 높여 이르는 호칭이다.
아호하면 서예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 1786~1856년)가 있다. 그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서예가다. 그는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자다. 왕실의 내척(內戚)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경축 분위기에 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탄생 설화도 갖고 있다. 아버지 노경(魯敬)과 어머니 유씨 사이의 장남으로 24개월 만에 출생했다. 그가 태어난 향저(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말라버리고 뒷산인 오석산의 원맥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샘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 서울 집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의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된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그의 아버지에게 충고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아이는 글씨로서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 천재성이 그의 인생에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드리우고 있음을 노재상이 알아본 것이다.

또한 단원 김홍도(1745년)와 대동여지도의 김정호의 호는 고산자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에 태어났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글을 접하고서 학문의 뜻을 굳게 했다.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기도 했다. 다산은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이 시작됐다. 학문과 행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얻으며 측근으로 활동했다.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의 활동, 수원화성의 설계, 암행어사로서의 활약, 곡산부사 임기 중 지방행정관으로 있으면서 장차 정조가 중용할 것을 예상됐다. 그러나 정적들은 다산의 성장과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에 위기감을 느끼고 천주교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다산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내몰린다.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켰다.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민(民)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18년을 더 살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훗날 인정해주길 기대했다. 다산은 만년에 '사암(俟菴)'을 자신의 호로 사용했다. 사암(俟菴)이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성인에게도 자기 학문은 질책 받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배어있다. 이러한 아호의 영향인지 몰라도 1762년 임오년, '다산'의 호를 풀이해 보면 후천운을 나타내는 지지명운에서 4. 8. 4의 흉한 배합이 있어 관료로서 명성이 자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귀양살이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말년에 지었다는 사암의 호는 천간에서의 9. 5. 9에 의해 학문에 몰두하게 되었고, 지지에서의 8. 4. 0에 의해 후세까지 명성이 길이길이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