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금빛평생교육봉사단 자문위원
콩주머니, 팥주머니, 모래주머니 오재미는 옛 국민학교 가을운동회의 필수 준비물이었다. 늦은 가을 밤, 어머니는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알록달록 탱탱한 오재미를 만들어주셨다. 아마도 그건 어머니의 어린 시절 추억도 함께 담은 사랑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눈부시게 높고 푸른 날, 만국기가 휘날렸다. 하얀 선을 그린 운동장의 행진곡 음악은 발걸음마저 가볍게 했다.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춰 몇날 며칠을 연습했던 곤봉체조, 매스게임 율동이 펼쳐졌다. 국회의원, 면장, 우체국장, 파출소장 등 손님들도 많았다. 외빈 천막을 안내하는 교장 선생님의 인사와 영접은 깍듯했다.
특별한 방과 후 활동이 없었던 시절, 가을 운동회는 마을축제였다. 틀에 박힌 학교교육의 울타리를 벗어나 지역사회가 모두 즐겼던 평생학습 프로그램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 등 가족이 함께 했던 가을 나들이였다.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응원한 공굴리기 게임이 끝나면 꿀 맛 같은 김밥 도시락을 돗자리 위에 펼쳤다. 군밤과 사이다 디저트가 있어도 학교 정문 앞 길목을 잡은 솜사탕 유혹은 달콤했다. '꽝'만 꽂았던 뽑기 돌림판은 아직도 아쉽다.
가을 운동회의 백미는 아버지, 선생님과 함께 뛴 이어달리기였다. 결과에 따라 백군과 청군의 우승이 역전되는 짜릿한 순간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참가상으로 받은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가 더 큰 추억으로 밀려온다.

봉건 사회의 개혁이 시작된 개화기의 운동회는 충군애국의 국가 의례를 반복한 학습의 과정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스포츠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군국주의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는 학교의 예산부족을 이유로 학부모 등으로부터 찬조금을 징수해 폐지, 부활되는 과정을 거쳤다. 최근, 도심에 위치한 초등학교들의 가을 운동회는 소음 민원, 다양한 체험학습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농촌 마을도 학생 수의 감소로 예전 같은 잔치 분위기는 사라지고 있다.
방과 후 평생교육 분야에서 배운 소질과 재능을 발표하는 작품전시회, 음악회, 학예회, 체육대회 등 각종 특기적성 체험 활동이 활발해진 까닭이기도 하다.
평생교육 프로그램은 여가와 학습의 경계를 허문다. 생활 속에서 배우는 우연학습(informal learning)을 강조한다. 평생학습사회의 진전에 따라 가을운동회는 여가를 활용한 학습의 공간으로서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성격의 프로그램으로 변신하고 있다.
가을 운동회 프로그램 말미에는 청색, 백색의 박을 터트리는 오재미가 청아한 가을하늘을 수놓았다. 터진 박 속에서 쏟아진 오색 종이와 휘호는 개인과 단체, 지역과 국가의 '대박'을 기원했다. 경쟁의식을 키운 것이 아니라 협동과 화합의 정신을 나누었다. 청군과 백군으로 편을 가르거나 결과를 놓고 주먹다짐 하지 않았다. 상대편에 즐거운 칭찬, 아낌없는 격려가 오갔다.
가을 하늘은 백성을 돌보는 어진 마음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민천(旻天)이라고 했다. 더욱이 가을 운동회는 이런 민천 아래서 열렸다. 요즘 정치 세태를 보면 국회 앞 마당에서 여야가 가을 운동회를 열어야 할 판이다.
강화도조약 이후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들인 관문으로서 인천은 아시아경기대회의 웅장한 막을 올렸다. 인천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펼치는 평생학습 프로그램의 기회를 가진 셈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준비해온 개막식은 '소문 난 잔치'처럼 체육을 통해 인천의 정체성, 대한민국의 혼을 살리기에 미흡했다는 평가다.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은 보여주는 의미보다 가을 운동회의 '박 터트리기'와 같은 격려와 배려의 의미를 담아 유종의 미를 거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