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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아시안게임은 195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되었다. 1948년 런던에서 열렸던 14회 하계올림픽대회 때에 인도 출신 IOC 위원이었던 두트손디는 아시아 스포츠 지도자들에게 아시아의 새로운 발전과 협력 그리고 건전한 경쟁을 위해 아시안게임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와 필리핀, 미얀마(버마), 인도, 중국(중화민국), 스리랑카(실론) 등 6개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선수권연맹을 창시하여 3년 후 뉴델리에서 첫 대회를 개최했다. ▶이에 앞서 아시아에서는 극동선수권대회가 1913년 필리핀에서 개최되었다. 일본제국과 필리핀 및 중화민국과의 화합과 협력을 위해 창설된 극동대회는 그 후 몇 나라가 추가로 합류하여 계속되었으나 일본의 중국 침략과 필리핀 합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막을 내렸다. 아시아 올림픽평의회는 지난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시안게임 100주년 기념식을 필리핀체육회(NOC)와 함께 성대하게 개최함으로써 1913년 극동대회가 아시안게임의 뿌리로 공인되었다. ▶우리나라가 창립회원국으로 참여했던 1951년 뉴델리대회에는 6·25전쟁으로 한국이 불참한 채 11개국이 참가하는 소규모 대회로 출발했다. 그러나 아시아에 신생독립국가들이 늘어남에 따라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이스라엘을 축출하고 중화민국의 참가 문제가 제기되면서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특히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6회 대회가 반납되는 과정에서 쿠웨이트를 중심으로 한 중동 산유 국가들이 아시안게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982년 뉴델리에서 열렸던 9회 대회를 계기로 아시아올림픽평의회를 결성하는 산티아고 회의에 당시 대한체육 회장이던 박종규씨와 함께 참가했던 필자는 2표 차이로 OCA 회장 자리가 한국에서 쿠웨이트로 넘어가는 현장에서 착잡한 느낌이 들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베이징, 카타르, 광저우를 거치면서 45개국의 15000여 선수가 참가해 올림픽 규모를 능가하는 행사로 주최도시의 재정부담도 가중되었다. 베트남이 18회 대회 개최권을 반납한 후 자카르타가 대타로 결정되었다. 적정규모의 행사가 절실한 시점에서 인천대회가 모범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