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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두 차례에 걸쳐 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을 지내고 유치가 성공한 후에는 조직위원회의 대외협력 위원장으로 대회 준비에 참여해온 필자는 남다른 감회와 회한을 느낀다. 국내적으로는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던 평창과 대외적으로는 아시안게임의 창시국 인도의 뉴델리와 대결을 극복했었다는 감동을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인천시민들이 함께하는 진정한 축제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는 자괴심 때문이다. ▶조선일보사에 재직하고 있으면서 1974년 세계사격대회 유치를 시작으로 1981년 바덴바덴에서의 88서울올림픽 그리고 2002년 FIFA월드컵 유치에 앞장섰던 필자에게 고향 인천의 아시안게임 유치는 필연적이자 운명적인 임무였다. 조부님(愼順晟 함장)과 선친(愼兌範 박사)의 뜻을 받들어 인천 발전에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을 통해서 인천을 동북아의 허브로 도약시키고 인천이라는 도시를 시민들의 지혜를 모아 번듯한 국제도시로 정비하고 아시안게임 준비과정에서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흑자대회를 만들 수 있다는 꿈과 확신이 있었기에 험난했던 유치활동을 끝내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유치가 확정된 직후부터 필자의 소망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문학경기장을 환경 친화적이고 첨단 IT 기술이 접목된 스타디움으로 개보수하여 쓰는 대신 역대 시장(안상수·송영길)들은 서구 쪽에 또 다른 대형경기장 신축을 강행하면서 대통령과 중앙정부와 불필요한 각을 세웠다. 아시안게임 관련 시설을 신축하는데도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정 편의적으로 진행하는 우를 범했다. 더구나 인천시민의 관심과 지원을 유도하는 측면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도 조직위원회는 7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45억 아시아의 축제를 북한 선수단의 참가 속에 막을 올리게 되었다. 이제는 과거를 되씹기보다는 대회를 차질 없이 치르는 일만이 남아있다. 유정복 시장의 복안대로 인천의 도시브랜드 가치를 제고시키고 앞으로 실속있는 국제체육대회를 계속 유치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