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
조우성.jpg
우리 고장 인천은 근대 스포츠 문화의 발신지였다. 1883년 제물포가 개항장으로 지정되자 난생 처음 보는 신문물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여행가, 선교사, 사업가, 외교관, 정치인, 군인, 의사 등이 속속 인천에 발을 내디뎌 제게 맡겨진 시대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개항 직전인 1882년 6월 인천을 찾은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 호도 있었다. 정박 중 수병들이 웃터골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벌인 최초의 축구경기였고, 그때 주고 간 공으로 시합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축구사를 써왔던 것이다. ▶야구가 국내에 들어온 것도 인천을 통해서였다. 신식 스포츠인 '베이스 볼'도 개화 문물의 하나였다. 과거의 통설로는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였던 필립 질레트가 가르친 것이 효시라고 하지만, 인천에서는 이미 1899년에 '베이스볼' 경기를 하고 있었다.▶인천고(仁川高)의 전신인 인천영어야학교의 한 학생은 1899년 2월3일자 일기에서 "4시경부터 중상(中上) 군을 불러내어 일연종(一蓮宗ㆍ옛 신흥초등학교 옆의 절) 앞 광장에서 함께 '베이스 볼'이라는 서양식공치기를 하고 5시경에 돌아와 목욕탕에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인천 거주 일본 학생의 일기이나, 이것이 '국내 최초의 야구(野球) 기록'인 것이다.▶마라톤 역시 인천의 주요한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그에는 지정적인 영향이 컸다. 경인간에 넓은 신작로가 개설된 후 인천에서 출발할 경우 반듯한 마라톤 정규 코스가 나왔던 것이다. ▶42.195㎞를 달리는 장거리 도로 경주에 적합한 도로가 아직 타 지역에는 없었다. 이따금 서울을 한 바퀴 도는 '경성일주대회'도 열렸지만, 인천-서울 간을 달리는 역전(驛傳)경주대회가 매년 열렸고, 그 같은 풍토 속에서 자란 각 학교의 육상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처럼 인천은 근대 스포츠를 화려하게 꽃피운 체육의 도시였다. 그로부터 한 세기여가 지난 오늘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감개무량한 역사적인 귀결이다. 모두 모두 손잡고, 이 대회를 역사적인 축제로 승화시켜야겠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