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구 인천여고 교사
단식은 못할 짓이다. 굶어본 이들은 안다. 밥을 굶으면서도 나누는 대화 태반은 먹는 얘기다. 하루에 세 끼씩 꼬박꼬박 넣어주던 몸을 달래는데 음식은 기억만으로도 힘이 된다. 단식이 끝나면 먹을 수 있으리라는 갈망이 기억 속에 남은 음식마저 긁어내어 배고픔을 이기게 한다. 하지만 그건 끝이 보이는 단식일 경우다. 정상인도 보름가량 지나면 병원 문턱을 오락가락할 정도로 탈진하게 된다. 그 고비를 넘어선 단식은 몸 안에 죽음을 쌓아가는 일이다. 자식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본 아비가 있다. 그가 밥을 굶겠다는 건 이미 무너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겠다는 뜻이다. 그가 굶을 때 몸에 쌓이는 죽음은 그의 삶과 대립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식의 죽음과 씨름하는 중이다. 자신의 삶을 주더라도 자식의 죽음을 되돌리고 싶어서, 그게 원이 되어서 죽음으로 죽음을 넘겠다는 것이다.

쇼라느니, 장사라느니 손가락질 하는 이들이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경지가 있다. 죽음으로라도 지켜야 할 가치의 높이다. 곡기를 끊어 죽음을 받아들였던 고승들의 결기를 생명 훼손이라고 부르댈 수는 없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한이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가를 알 수 없는 이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슬픔을 알지 못한다. 자신만을 위해 눈물을 사용해 온 이들은 죽음을 불사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무감에서 나온 그 무지는 자신의 고무줄 잣대로 그 아비의 슬픔을 재려 든다.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한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보름을 세 번 넘도록 단식이 이어져왔다. 무엇으로도 위무할 수 없는 끝 간 데 없는 한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면, 침묵만이 단식을 대하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다.

10여 년 전 일이다. 지율스님은 100일 동안을 굶어가며 죽을 위기에 놓인 자연에게 삶을 부여하려 했다. 그 때도 어떤 이들은 사람이 어찌 100일을 물과 소금만으로 버틸 수 있겠느냐고 을러댔다. 앞에서 굶고 뒤에서 영양을 보충한다고, 그렇게 단식쇼를 한다고 수군댔다. 그들의 후예는 오늘 그 아비가 단식하는 면전에서 '생명 존중 폭식투쟁'을 하겠다는 철부지청년이 되어 나타났다. 그 아비의 단식에 항의하며 릴레이로 하루씩 굶겠다고 나선 철부지 어르신들은 현수막 뒤에서 닭다리를 뜯다가 카메라에 결렸다. 그들의 공통점은 나이와 상관없이 타인의 슬픔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종지만한 깊이에 타인의 바다 같은 슬픔을 담을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다. 그럴 때 우리는 껍데기만 흡사할 뿐 속은 영 다른 종류의 인류를 보게 된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영화 '헝거(Hunger)'는 단식으로 항거하는 인간의 배고픔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면서 인간만이 지닌 갈망(Hunger)을 증언한다. 굶어 죽어가는 자식의 높은 뜻을 알기에 어미는 죽음에 이르는 단식을 차마 말리지 못한다. 그 어미가 겪었을 극한의 슬픔 앞에서 웬만한 죽음조차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은 슬픔을 슬픔 이상의 의미로 들어 올린다. 안중근의 어머니가 편지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고 쓸 때 그 손이 어떻게 슬피 떨고 있는지를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만이 닿을 수 있는 슬픔의 심연에 이를 수 없다.

100일을 굶었던 지율 스님은 오늘도 내성천이 겪는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울고 있다. 헝거의 실제 인물 바비 샌즈는 감옥에서 66일을 굶어 아사를 선택했지만 아일랜드를 넘어 인류의 영혼을 울게 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보다 슬픈 삶을 견디느라 굶고 있는 어떤 아비 앞에서 어느 만큼 사람인가? 죽음을 조롱하고 슬픔을 희화화하는 이들을 보면서 가슴을 때리며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교육은 눈물을 가르치지 않고 뭘 가르쳐 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