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5년이 지난 일이다. 수능을 코앞에 둔 작은 아들놈이 개차반이 돼서 집에 들어왔다. 담임선생한테 얼마나 줘 터졌는지 끙끙대면서 엎치락뒤치락 좌불안석 했다. 볼기짝에 약을 발라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당무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빨래판처럼 부은 채 삭히는 비명소리가 집안의 잠을 거두어 갔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먼동이 트고 난 후였다. 마누라와 눈이 마주친 것은 실핏줄 같은 여명이 안방에 겨우 드리워질 무렵. 밤새 뒤척이던 거였다. 수능도 얼마 안 남았고 반장이던 아들놈이 뭔가 큰 잘못을 했으려니, 몇 대 맞았다고 득달같이 학교로 달려가는 꼬락서니도 채신머리없어 보여 '참아내'던 것이 어느새 5년이 지나버렸다. 큰집 조카들은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페어펙스에 있는 조지 메이슨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 두 놈은 아들 딸 낳고 사는 나이가 됐지만, 학교 다닐 당시 교실에서 벌어졌던 일화를 심심치 않게 끄집어내곤 하였다. 그 중, 한 학생이 강의 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교수는 모자를 벗으라 했고 학생은 "내 모자 내가 썼는데, 왜 신경 쓰느냐. 관심 꺼라"라고 했단다. 이어 교수 왈 "나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의 눈과 마주치면서, 내 수업을 이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자네의 모자로 인해서 방해를 받고 있으니 벗으라" 했다고 한다. 거드름 피며 뻣대던 학생은 교수의 엄중한 교습지침을 '이해'하고 결국 모자를 벗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신포동 문화의 거리는 일방통행길이다. 이 거리가 '서울의 명동'구실을 하며 명성의 극대점을 이룰 때, 좁았지만 쌍방통행 구실을 충실히 해왔던 길이었다. 아울러 길목의 경동 사거리는 인천 최초의 신호등이 설치되어 변화의 상징적 공간이란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길은 이정표를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역주행은 물론, 범칙금부과와 주차 등 싸움의 불씨를 던질 만큼 거친 거리가 되었다. 주목할 것은 인천이 덩지를 불려나가고 외형적 발전을 거듭할수록 행정의 행태들이 일방통행처럼 강요되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톡 까놓고 말해서, 시민을 섬기고 시민이 주체가 되고 시민을 모든 현상의 주인으로 모시는 게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해 보인다는 점이다. 소통은 불통과 자웅동체이며 한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액과 같다. 미완의 통로를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따라 완성된 흐름과 삶의 평화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윗글의 첫 번째 사례는 교육의 정의를 짐짓 내리기 어려운 시점에서 소통의 소극적 방편으로 '참았음'을 이야기 했고, 두 번째 사례에서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식이 가르치는 자의 '진중한 논리'가 문제 학생에게 먹혔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작금의 민주사회에서 주객이 전도된 채 변질되어 가는 일방행정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원도심에서 자행되는 일련의 치장행위가 그것이다. 상도를 권장하고 삶의 진정성을 행정적으로 도모해야할 관청이, 상술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 시민의 혈세로 건물의 껍데기만 바꾸면 세상이 변한다는 기묘한 논리를 펴고 있어서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좀처럼 회복 낌새가 없어 보이는 지역경제가 우려스럽다. 위태로운 숨통을 먼저 트고 보자는 측과 더디더라도 긴 호흡으로 합일점을 찾자는 측의 연결통로가 비틀어져 있는 상황도 한몫하고 있다. 비상하려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두 날개를 퍼덕여야 하기 때문에 슬기가 모아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아울러 시민권의 대리자는 시민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고 두 귀를 더 크게 열고, 센스 있게 어깨동무하는 도량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