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환 박사의 인천史 산책-37
평신도 은행원에서 사제가 돼 하와이 동포 아픔 어루만져
   
▲ 조광원 신부.

인천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성공회 사제가 있다. 강화 출신의 조광원 신부다. 그는 1897년 10월21일 강화 온수리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성공회 강화성당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성공회 신자가 됐다. 청년시절에는 평신도 지도자로 우뚝 섰다. 그 후 조광원은 인천상업학교에 진학해 졸업 후 은행원의 길로 들어서 직장생활을 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의식을 잃지 않고 지식인 역할을 찾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성공회 잡지에 실은 '우리의 의기와 책임'이라는 글을 보면 식민지 백성이 크리스천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역사적 책임의식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하 내용은 주성식 신부, '한국 성공회 신앙의 선각자-조광원(노아) 신부', 성공회신문 713호, 2009. 11. 15 참조)

그는 일찍부터 성공회 교회의 젊은 일꾼으로 교회 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1921년 4월25일부터 서울 정동성당에서 열린 제3회 전도구연합회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전도계획 수립과 민주적인 교회운영, 평신도 참여 폭을 넓히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때 조광원은 '전도장려부' 설치를 위한 기초위원에 선임됐다. 그 결과 '경성전도대'가 조직되고 전국적인 사경회와 전도집회가 열려 성공회 성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평신도 조광원은 트롤로프(조마가) 주교 명을 받아 미국 성공회 하와이교구로 파송됐다. 하와이 성공회에서 초창기부터 개척자로 일하던 조병요(趙炳堯) 전도사가 사임함에 따라 그 후임을 겸해 보낸 것이다. 조광원은 1923년 11월4일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그 해 12월7일 호놀룰루에 도착해 학교생활과 함께 조선인 전도사업을 담당했다.

조광원은 그 후 미국 나쇼다 성공회신학대학에서 신학수업을 마치고 1928년 6월 3일 하와이교구장으로부터 부제성직안수를 받았다. 해외에서 성직을 받은 최초의 한국 성공회인이었다. 그리고 1931년 5월 1일 하와이에서 리틀(S. H. Littell) 주교에게 사제성직을 받았다. 그는 하와이에서 1906년부터 이어진 국어교육을 계승해 교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1941년까지 국어교실을 열어 나갔다. 1944년 9월 사이판전투에 참전하기 16일 전까지도 하와이 성루가교회 관할사제로 14년간 시무하면서 망국의 설움을 안고 살아가는 한국 동포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위로하기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 조광원 신부가 편집에 참여했던'국민보'.

조광원은 목회생활과 더불어 일제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도 적극 활동했다. 박용만이 설립한 조선독립단에 가입해 하와이총지부 위원으로서 기관지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를 간행하고 국민회에 가입해 '국민보'(國民報)를 간행하는 일에 참가했다. 대동아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는 더 적극적으로 한인자위단을 조직해 일본인 첩자를 색출하는 일과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에도 매진했다. 1944년 9월 그는 미해병대 종군 신부로 지원해 사이판 전투에 참전했다. 사이판에서 대일 선전공작 활동을 벌이는 한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을 구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당시 조광원 신부활약상은 미해병대 소위로서 사이판전투에 종군했던 짐 루카스 기자에 의해 성조신문 전면에 실리기도 했다.
 

   
▲ 조광원 신부가 다녔던 강화 성공회 온수리교회.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조광원은 미군 군종신부로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한 그는 미군정 통위부 미군책임자의 고문 일을 보다가 2년 후 교회 일을 위해 다시 미국에 건너갔다. 그리고 6·25가 나던 1950년 다시 귀국했다가 일본 성공회 초청으로 고베 교구의 사제로 1957년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시무했다. 한국 성공회로 돌아온 조광원은 자신의 고향인 강화 온수리교회 관할사제로 시무했다. 조 신부는 또 성미가엘신학원이 성직후보자 교육을 시작한 1961년 9월부터 교수직을 맡아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이때 발간한 저서로 '신자의 생활'과 '성인들의 생애' 등이 있다.

폭넓은 세계와 다양한 식견을 겸비한 조광원 신부의 큰 관심사는 한국교회 일치운동이었다. 1960년 2월24일 대한성공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회원교단으로 가입하면서 그의 '에큐메니컬운동'은 본격화했다. 당시 교회일치운동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천주교에까지 폭넓게 진행됐다. 정부에서는 뒤늦게 조광원 신부의 독립운동 치적을 인정해 199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참조) 성공회가 강화와 인천에 상륙한 이후 인천지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아직 제대로 연구를 하지 않은 듯하다. 조광원 신부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