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박물관협의회 2014해외탐방
머나먼 제국, 터키&그리스 2블루모스크와 보스포러스
   
 

블루모스크
쇠락시기 건설·제국의 영원 기원
미나레 6개·아라베스크 문양 화려
 

   
▲ '보스포러스해협'은 기원전부터 아시아와 유럽 한 가운데를 흐르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해협을 가르며 나아가는 보트 뒤로 유럽 쪽 풍광이 펼쳐져 있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맞은 편은 아시아지역으로 건물 형태부터 다르다.

보스포러스해협
기원전부터 지중해 요충지로 다툼 치열
바다 한쪽은 유럽, 한쪽은 아시아 이채

태양의 부서진 조각들이, 바다 위에서 물비늘로 반짝인다. 유럽과 아시아를 한아름에 품고 있는 '보스포러스해협'을 가르며 보트가 천천히 나아간다.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한 땅 '이스탄불'. 오래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 땅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 넘쳐난다. 과거 국제교역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면, 2014년 봄엔 인천시립박물관협회와 같은 역사문화탐방단이나, 관광객들이 찾는다는 사실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스탄불의 3월은 성지순례가 가장 많은 달이기도 하다.
 

   
▲ 무슬림들과 관광객들이 블루모스크 외부(사진 위)와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이스탄불의 상징이자 터키의 대표적 모스크(이슬람사원)인 '블루모스크'에 닿은 것은 지난 3월22일(터키 현지시각) 오전이다. 정식 명칭은 모스크를 건설한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이지만 실내가 푸른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에 블루모스크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광각으로 초점을 잡았음에도, 블루모스크의 외관 전체를 카메라렌즈에 담기가 쉽지 않았다. 보통 모스크의 미나레(첨탑)는 1개~4개인데 블루모스크는 6개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6개의 첨탑을 렌즈 안에 집어 넣으려고 각도를 달리 잡으면 야자수와 같은 장애물이 앞을 가로 막았다.

1453년 비잔틴제국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은 수도를 이스탄불로 정한다. 이후 470여년 간 이스탄불은 터키의 수도로 기능해 왔다. 블루모스크는 천도 한참 뒤인 1609년 8월 건설을 시작해 1617년 5월 완공한 사원이다.

이 시기는 사실 오스만제국이 쇠락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오스만제국은 1593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승리하지 못 하고 작은 왕국이던 오스트리아를 동등한 제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제국 초유의 일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술탄 아흐메드1세(1603~1617 재위)는 실패에 따른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알라'에게 거대한 사원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모스크 건설을 담당한 사람은 궁전으로 팔려온 알바니아인 '센테프카르 메흐메드 아가'(1540~1617)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면 왕들은 신에게 의지하는 것일까. 고려 역시 몽골이 침략했을 때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세계 최대 목판인쇄물인 '팔만대장경'을 판각했었다. 팔만대장경은 이후 150년 간 강화도에 보관되며 고려라는 나라를 지켜주었다. 아흐메드1세 역시 하늘의 문에 닿을 만큼이나 높은 미나레를 6개나 가진 모스크를 건설하며 알라신을 향해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기원했으리라.

인천박물관협의회 회원들은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있는 뒷쪽 문을 이용해야 했다. 남자들은 신발만 벗고, 여자들은 머리에 스카프와 같은 것을 쓰고 안으로 들어갔다. 붉고 푸른 양탄자와 푸른빛깔을 발산하는 거대한 천정. 출입문을 지나자 겉에서 보던 것보다 몇 배는 크게 느껴지는 실내에 회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 하나만 봐도 수십 명이 손을 맞잡아야 겨우 둘러쌀 수 있을 것처럼 거대했다. 벽의 아랫 부분에 새겨진 '쿠란'을 향해 검은 차도르를 쓰고 절을 하는 무슬림들과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관광객들로 내부는 시끌벅적했다.

블루모스크가 이처럼 화려하고 거대하게 지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맞은 편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피아성당은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터키인들은 여전히 '그리스인들의 교회'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소피아성당은 537년 비잔티움 제국이 '성스런 지혜'란 뜻으로 지은 그리스건축의 대작이었던 것이다. 이후 961년 동안 그리스교회로 사용되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리스(이스탄불)를 점령하며 이슬람사원으로 개조된다.

술탄 아흐메드의 야망에도 불구하고, 블루모스크는 결과적으로 규모나 건축미에서 1000년 앞서 지어진 소피아성당을 따라잡속 못 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육안으로 보면 블루모스크가 소피아성당보다 웅대해 보이지만 이는 지대가 높기 때문일 뿐, 실은 그렇지 않다. 블루모스크 중앙 돔의 지름과 높이는 각각 23.5m, 43m이다. 이에 비해 소피아성당의 그것은 지름이 33m이며 높이는 56m에 이른다. 건물의 크기 역시 블루모스크가 길이 51m, 너비 53m인 반면 소피아성당은 길이가 77m, 너비는 71.7m에 달한다.


그렇지만 내부 장식에 있어서는 블루모스크가 더 화려한 것처럼 보인다. 블루모스크는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아라베스크 문양에 푸른 빛깔이 감도는 2만1000여개의 이즈닉타일로 장식돼 있다. 블루모스크의 완공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제국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유럽의 신흥 강국들은 황혼의 제국인 오스만을 향해 '유럽의 환자'라는 조롱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블루모스크를 찾기에 앞서 인천박물관협의회 탐방단은 아침 일찍 보스포러스 해협을 항해한 터였다. 유럽과 아시아 한 가운데를 흐르는, 32km에 이르는 해협이다. 한 쪽은 모스크와 같은 오스만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즐비하고 다른 한 방향은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이채로워 보였다. '트로이전쟁'이 뱃길을 두고 벌인 헤게모니 싸움이었듯이, 그리스인들은 보스포러스해협과 같은 뱃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보스포러스(소가 건너간 곳)가, 제우스가 바람을 피운 '이오'라는 요정이 암소로 변해 해협을 건너간 뒤 지어진 이름이고 보면, 이곳은 수천 년 간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보트 2층 난간에 서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눈 앞으로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선두와 선미로 갈매기들이 따라 붙은 것이다. 저 바닷새들의 전생은 혹시 수천 년 전 혹은 수백 년 전, 해협을 오가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피하기 위해 선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중세의 비밀을 잔뜩 품고 있는 것 같던 짙푸른 바다가 새하얀 포말을 토해내며 뭐라 말을 걸어왔다.

/이스탄불=글·사진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앙카라에서 만난 터키의 역사

한 때 유럽 맹주 … 지중해 절반 차지하기도
 

   
▲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있는'아타튀르크영묘'광장에서 인천박물관협의회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인천박물관협의회(회장 이귀례) 회원들이 '케말파샤'로 더 잘 알려진 앙카라의 케말 아타튀르크('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 초대대통령 영묘를 찾은 때는 현지시각 지난 3월24일 오전. 파르테논신전을 연상시키는 건물과 대리석으로 치장한 내부를 보며 터키에서의 케말파샤 위상이 감지됐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이란 이름을 가졌던 터키의 기원은 8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터키땅은 기원전 6500년 전부터 부족 간, 나라 간 뺏고 빼앗는 혈투의 땅이었다.

서유럽에서 태동한 헬레니즘(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건설 이후 고대 그리스 뒤에 나타난 문명)과 그리스도교가 성장했고, 동쪽 중앙아시아의 유목문화와 이슬람교가 터를 닦은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6500년 터키엔 '차탈효육'이란 최초의 부락이 형성된다. 기원전 1900~1200년 '히타이트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했으나 이후 '프리지아'와 '리디아' 인들의 차지가 된다.

기원전 6세기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가, 기원전 1세기엔 로마가 각각 이 땅을 차지한다.

이후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콘스탄티노플리스(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으며 '비잔티움'(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 동·서로 분열된 중세 로마제국 중 동로마 제국(330~1453))의 지배를 받
게 된다.

6세기 중반 등장한 '돌궐족'은 동북아시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중앙아시아 맹주였던 이들은 그러나 11세기 투르크 유목민인 '오구즈족'의 공격을 받았고, 이때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셀주크제국'이 탄생한다. 이들이 바로 11세기~14세기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일대를 호령한 '수니파' 무슬림 왕조다. 셀주크제국은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공격으로 몇 개의 토후국으로 분할됐고 이 가운데 하나의 부족이 '권토중래'로 나라를 일으켰으니 바로 '오스만투르크'이다.

아나톨리아 한 구석의 작은 나라였던 오스만왕조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오스만제국'으로 성장한다. 오스만제국은 비잔티움제국과 같은 동유럽 기독교 국가를 정복하고, '맘루크 왕조'(13~16세기 약 250년 간 이집트 지역에 있던 왕조) 등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이슬람 제국까지 통합하며 다민족제국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이스탄불을 수도 삼아 서쪽 모로코, 동쪽 아제르바이젠, 북쪽 우크라이나, 남쪽 예멘에 이르기까지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지중해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런 오스만제국이 저물기 시작한 때는 술탄 쉴레이만1세(1494~1566)때 부터다.

1718년엔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빼앗고, 1783년 러시아가 크리미아를 합병한다. 1830년 그리스를 시작으로 1881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차례차례 독립하더니, 1908년 불가리아, 1912년 알바니아까지 주권국가가 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처럼 점점 기울어가던 나라를 다시 추스려 세운 사람이 바로 케말 아타튀르크이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오스만제국 땅은 연합군에게 점령당한다. 국제정세 오판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 섰기 때문이다. 케말파샤는 이 때 민족부흥운동과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 동맹에 맞서 터키의 해방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으로 터키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가 터키의 '국부'로 추앙받는 이유다.

아타튀르크의 묘지가 있는 본당, 터키 독립전쟁 상황을 재현한 유화와 벽화, 디오라마 등을 전시한 독립전쟁박물관을 돌아본 일행이 버스에 올랐다. 앙카라의 푸른 하늘에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터키국기가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앙카라=글·사진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