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의 입구 고양시 지도읍 행주내동에 맨돌부락이 있다. 김포쪽에서 한강을 건너 39번 도로의 오른쪽이요 반대로 원당쪽에서는 산성으로 들어서는 왼편이다. 맨돌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된 세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옛날 한강으로 배가 드나들던 시절 이곳에 이름난 주막이 있었으며 잠시 머물러 배를 대면서 강가의 커다란 돌에 배를 묶느라 끈으로 매는 돌이 있는 곳이라 해서 맨돌이라 했다는 것이다. 한자로는 結石(결석)이다. 그런가 하면 이곳 일대가 진흙탕 길이었는데 해가 쬐면 곧 질던 길이 마치 돌덩이처럼 굳어진다고 해서 맨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행주대첩과 연관한 유래이다. 이곳에는 돌이 많아 맨 돌 천지여서 맨돌마을이었는데 그 돌을 행주산성 싸움에 아녀자들이 치마에 담아 군사들에게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때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은 왜군 침입의 이듬해인 1593년 2월13일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인근 벽제관에서 명군을 대파한 왜군은 의기충천하여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그날 새벽 공격해 왔다. 그러나 군사와 아녀자의 피나는 항전 그리고 권율장군의 독전으로 끝내 성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일격에 성을 점령하리라던 왜군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불과 반나절의 싸움에서 1만여 전사자를 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행주산성의 승전은 어쩌면 군사들 못지 않게 그곳 아녀자들의 몫이었다. 적이 섶을 묶어 불을 질러 성책을 태우면 급히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적군이 절벽을 기어오르면 돌을 굴려 쳐부수었다. 돌도 여인들이 앞치마에 담아 날랐다. 그로인해 행주치마의 전설이 낳아졌다. 뒷날 명의 황제는 사신을 보내 권장군을 위로했다고 전한다. 『조선은 본래 강한 나라라고 했는데 권장군이 적을 많이 참획했다니 그나라 백성들이 사기를 떨칠만 했겠다.』

 어제 400여년 전 승전의 바로 그 현장에서 행주대첩제가 있었다. 보도로는 부녀회원들의 봉사가 더욱 돋보여 기념행사이면서도 주민들의 축제의 장이 되었다고 한다. 민족혼이 서린 행주치마의 잔치였던 셈이다.